미지수 에디터와 함께하는 투룸 동남아 리포트
캄보디아에 가기 전, 그곳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앙코르와트 하나뿐이었습니다. 상상 이상의 환상적인 경관은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고, 악몽 같았던 역사를 견뎌내고 현실을 꿋꿋이 살아내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다양한 생각과 감정으로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해외 거주 이방인들의 일상 & 커리어스토리를 담는 월간 유료 투룸매거진 27호에 수록된 콘텐츠입니다.
글/사진 미지수
태국과 베트남에 비해 캄보디아는 맛있는 비건 밥 한 끼 먹기가 유난히 고단했다. 캄폿에서의 마지막 날, 큰 기대 없이 숙소에서 5분 거리의 채식 식당으로 걸어갔다. 오전 열한 시, 아직 고요한 카페 안쪽 자리에 들어가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벽에 진열된 책을 살피던 파트너가 식당 주인인 소피가 쓴 책을 우연히 발견해 나도 한 권을 건네받았다. 차례를 훑어보고 관심이 가는 부분을 조금씩 읽었다. 안타깝고 슬프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주로 남자아이의 이름이라는 소피악의 뜻은 행복이다. 소피의 가족은 어려운 형편에도 서로를 끔찍이 아낀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받았고, 프놈펜에서 대학 교육을 받으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가족들을 앙코르와트로 초대했다. 기력이 쇠약해진 소피의 엄마는 평생소원이던 앙코르와트에 마침내 방문해 무척 행복해했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소피도 뿌듯했다.
두부버거를 먹은 다음 두유 넣은 홍차를 마시며 차분하고 다정한 소피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소피는 서빙하고 여동생은 요리하며 함께 CV cafe를 운영한다. 엄마는 돌아가시고 자매는 아빠와 산다. 책에도 썼지만, 정신과 의사하나 없는 작은 도시인 캄폿에서 한창 아플 때 전문 치료를 받을 수 없어 더 힘들었던 소피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있으며, 책 읽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곧 카페 옆에 서점을 열 예정이다. 큰 회사에서 일도 해봤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서빙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 식당을 운영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곧 카페는 바빠졌고, 우리는 소피의 책 <I’m Happiness>을 사서 그곳을 나왔다.
코롱의 론리비치로 가는 길은 문자 그대로 멀고 험했다. 공항이 없는 섬의 북쪽 끝, 오토바이 택시만 갈 수 있는 외진 곳. 더 가까운 항구로 가려고 커다란 얼음덩이들, 가공품, 가스통, 겁에 질린 아기돼지들이 탄 허름한 보급선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오토바이 한 대를 싣고는 쓰다 버린 것 같은 엔진 두 개를 시작해 출발했다. 손을 뻗으면 바다에 닿았고 종종 물이 들어왔으며 나무 바닥이 딱딱해 엉덩이가 아팠다. 가는 도중 엔진 하나가 멈췄다 다시 작동했고, 오토바이 뒤로는 해가 저물었다.
섬에 도착해 기다리니 작은 사람이 탄 작은 오토바이 택시가 왔다.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무겁게 느껴진 나와 배낭을 실은 그것은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모랫길과 흙먼지길, 얕은 물길과 산길을 달렸다. 땅에는 희미한 나무와 산의 실루엣, 하늘에는 콕콕박힌 별들이 보였고, 운전사에게선 땀 냄새와 군고구마 냄새가 났다. 도착한 방갈로의 지붕 틈새로 박쥐가 드나들었고 게코 도마뱀이 끽끽 댔다.
방갈로에서 도보 5분 거리의 바다는 수심이 얕고 물이 깨끗해 속이 훤히 보였다. 친환경을 지향하는 숙소엔 에어컨도 플라스틱 소모품도 없으며, 빗물+우물물을 퍼서 써야 하고, 태양광 발전기로 만든 전기를 아껴 쓰는데,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식당 겸 쉼터엔 맛있는 비건 메뉴도 많다. 빛 공해가 적은 이곳의 바다에선 발광 플랑크톤을 볼 수 있다. 숙소 주인 다니의 조언대로 달이 지고 해가 뜨기 전 알람을 맞춰 무거운 눈꺼풀을 붙들고 주섬주섬 수영복을 입고 준비한 손전등을 들고 새벽 바다로 향했다.
투명했던 바다는 아득히 깜깜했다. 밤하늘엔 별이 가득 빛났고 바닷물은 새벽공기보다 따뜻했다. 허리 깊이까지 걸어가는데 물속에서 파란 점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모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더 많이 움직일수록 더 많은 파란 별들이 보였다 사라졌다.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계속 확인하고 싶어 무서움도 잊은 채 홀린 듯 한참을 물장구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임에도 몸은 그새 지쳤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방갈로로 돌아가는 데 좀 전의 일이 꿈만 같았다. 가는 길도, 최소한의 시설도,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모두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새벽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언젠가 교과서에서 나무에 뒤덮인 웅장한 고대 건물을 보았을 때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후 앙코르와트는 여행 우선순위에 들지 못하고 잊혀가고 있었다. 마치 그곳이 한참 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힌 채 자연에 잠식되어 가던 그때처럼.
추천받은 여성 운전사그룹에 하루를 예약했고, 약속한 시각에 연락한 선생님과 기사님이 숙소로 왔다. 선생님이 루트를 설명하며 지도를 보여줬는데 왜 앙코르와트 유적 티켓이 7일 권까지 있는지 이해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 고대 도시는 걷기엔 너무 크고, 자전거 타기엔 너무 힘들고, 스쿠터를 빌리기엔 길도 모르고 가격도 툭툭이랑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도착한 앙코르와트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 건축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정말 거대했다. 이곳만 꼼꼼히 둘러봐도 하루가 끝날 것 같아 탑만 훑어보고 툭툭으로 돌아갔다. 말은 안 통했지만, 기사님 덕분에 앙코르와트 구경이 한층 즐거웠다. 사원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나 여기 있다고 손을 크게 흔들어 반겨주고, 더위에 지쳐 툭툭으로 돌아오면 시원한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여성이 운전하는 툭툭을 탔더니 남성이 운전할 땐 느끼지 못했던, 그러나 낯설지만은 않은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기사님을 곱지 않게 쳐다보는 도로의 남자들의 무례한 눈빛에 화가 난 나와 달리 기사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일했다. 캄보디아에서 툭툭 운전은 소위 남성의 일로 여겨져 여성이 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놈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성 운전사의 툭툭을 탔다. 둘째 날엔 덜 유명하고 중심에서 더 먼 사원들을 돌았고, 셋째 날엔 아침 날씨가 맑아 일출을 보러 갔다.
캄보디아는 자꾸 나를 새벽에 일어나게 했다. 툭툭은 칠흑같이 까만 숲 도로를 달리다 멈추었고 다른 관광객 둘과 함께 온 첫날 뵀던 선생님이 나타나 길을 안내해 주었다. 전직 새 관찰 가이드였던 선생님은 일출을 기다리면서 새소리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새 이름을 척척 맞추었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을 때는 태양이 앙코르와트 한가운데로 뜬다고 한다. 그날의 해는 사원의 오른쪽에서 떠올랐는데 보랏빛에서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7일 권 티켓을 살 걸 그랬나?
영상으로 캄보디아 여행에 함께하기
https://youtu.be/cUX2Hut_v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