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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Feb 16. 2024

유튜브가 독서라는 이상한 착각

1-1 어느 강사의 이야기

들어가며


얼마 전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유튜브 시청이 독서와 같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 조사를 다룬 기사였다.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어 놀라울 정도였다. 유튜브가 독서라고 답변한 사람이 10%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 열 명 중에 한 명이 유튜브 시청이 독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서 인구가 5% 미만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참 기이한 현상이다. 책 한 장 펼쳐보지 않고서도 그런 단을 할 수 있다니! 특히 표본집단이 젊고 도심에 거주할수록 이런 성향이 도드라졌다. 서울에 거주하는 10대는 무려 20%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애독자인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니까'라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유튜브와 책의 구별은 가치 판단의 영역이 아닌 사실 판단의 영역이다. 단지 개개인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컵이 주전자가 될 수 없고, 둥근 지구가 평평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유튜브는 책이 될 수 없고 의 기능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튜브와 책은 태생과 기능 면에서 완전히 다른 매체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지식 전달의 기능면에서 공통점이 있으니, 유튜브 시청이 독서의 기능을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다고 말이다. 물론 지식 전달 측면에선 공통 분모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보자기를 덮었을 때 따뜻하다고 해서 보자기가 이불이 되는 건 아니다. 둘은 태생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활용 방식과 활용했을 때의 결과물이 다르다. 기능의 일시적 공유두 대상을 하나로 엮진 못한다. 집합 A와 집합 B가 하나의 원소를 공유해도 두 집합은 여전히 다른 집합이다.


그렇다면 왜 유튜브 시청을 독서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우리의 지식욕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된 지식욕이 유튜브가 독서의 영역을 침범하도록 부추겼다. 둘째, 자기가 늘 하는 행동이 특별한 의미가 있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현 사회의 고질적인 광범위 불안 증세가 자기 합리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연재를 통해 두 요인을 자세히 짚어보고, 지식 전달에 있어 유튜브가 가진 한계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1. 왜곡된 지식욕


1-1. 어느 강사의 이야기


우리에겐 수많은 욕구가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식욕·수면욕·성욕 등이 있고, 조금 더 고차원적으로는 창작 의지·유대감·봉사 등이 있다. 이 중에도 인간 특유의 호기심과 직결된 욕구가 있는데, 바로 알고자 하는 욕구인 지식욕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하고 호기심이 해결되면 쾌감이라는 보상을 얻도록 설계되었다. 우리가 추리 소설의 결말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런 기전이 인류가 지구를 정복하고(이것이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아가 우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문제는 지식욕이 충족되었을 때 얻는 쾌감이 정보의 질과는 무관하게 얻어진다이다.


예전에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한 TV프로를 본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한 프로였기에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시청한 건 처음이었다. 화면에선 강사 한 명이 수십 명의 방청객을 앞에 두고 한국사를 강의하고 있었다. 강사는 여러 사담을 섞어가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강사의 입담과 호소력이 워낙에 뛰어나서, 나도 모르는 사이 강연에 빠져들게 되었다. 역사 이면에 숨어있던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시청을 지속할수록 낌새가 이상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역사와 강사가 전하는 내용이 판이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전후 관계가 성립하기 힘든 방향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의구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몇몇 주장은 시간 순서가 맞지 않아서 뒤죽박죽이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아는 역사가 정확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역사는 새로운 발견으로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사실 확인을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확인 결과, 강사의 강연 중 많은 부분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마치 실제 사건인 듯 풀어내던 감동 실화들도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여러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주장도 있었다. 이렇게 단 한 편의 출연분에도 온갖 오류가 산재해 있는데, 그동안 그가 퍼트린 오류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당시 그 강사는 인기가 절정에 다다른 인물이었다. 여러 TV 프로에 출연하고 있었으며 다수의 책도 출간한 이력이 있었다. 거짓 정보가 지식이라는 탈을 쓰고 공공연히 활개 치던 것이다.


하지만 충격적인 지점은 뻔뻔하게 거짓 정보를 퍼트리던 강사가 아니었다. 그런 강사의 강연을 어떤 검증도 거치지 않고 기획한 방송사도 아니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화면에 간간이 잡히던 방청객들의 모습이었다. 방청객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을 때의 특유의 표정으로 강연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부는 강사가 전하는 설화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이비 교주의 설교를 신이 내린 계시인 양 듣고 있는 신도를 연상케 했다.


어쩌면 강사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전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사는 새로운 발견으로 끊임없이 갱신되기 때문이다. 강사의 능력이 출중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역사는 수십 명의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이 사료를 바탕으로 사실을 확인한다. 역사도 과학처럼 교차 검증과 삼자 검증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때로는 검증 과정에서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아 큰 이슈로 번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강사가 했던 이야기의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또 어떤 이는 그 강연이 단순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예능 프로처럼 웃고 즐기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다. 내가 재미로 여러분의 과거를 변질시킨다면, 여러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넘어갈 수 있는가? 내가 다른 이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는 이유로, 여러분을 강력 범죄의 가해자로 몬다면 수긍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역사는 사실의 영역이다. 비록 한 가지 역사적 사실로도 해석이 분분할 때가 있지만, 이는 해석의 차이일 뿐 실제 있었던 사건은 바뀌지 않는다. 일례로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일삼은 '이유'에 대해선 의견이 나뉠 순 있지만,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사실'은 의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렇듯 역사는 기분 따라 재미 따라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청객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생각은 없다. 가장 큰 잘못은 되는대로 발설하는 강사와 강연을 기획한 방송사에 있다. 하지만 방청객이 사고를 멈추고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면, 방청객도 거짓 정보 확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방청객의 일조 없이는 그 강사의 입이 힘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한 번 속으면 속인 놈이 나쁜 놈이고,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고, 세 번 속으면 그때는 공범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호기심이 해소될 때 쾌감을 느낀다. 그런데 뇌의 보상 기전은 호기심을 해소해 준 정보가 사실인지와는 무관하다. 그저 '새로운 사실을 습득했다'라는 기분만으로도 도파민 체계가 동한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기분, 이것이 거짓 선지자의 말에 우리가 현혹되는 원인이다. 우리의 왜곡된 지식욕이 사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셈이다.


알고자 하는 욕구의 충족도 다른 모든 보상 체계와 같이 중독성을 지닌다. 그러나 무분별한 거짓 정보는 술과 같다. 음식이지만 영양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장의 음주가 기분을 좋게 만들지만, 끝에 가서 남는 건 피폐해진 정신뿐이다. 이런 알코올 의존성 환자가 늘어날 때 최대 수혜자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주류 업계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해지고, 조금 더 현명해진다는 착각이 강사에게 부와 권력을 안겨준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그래서 이 강사의 사례가 유튜브와 독서가 다른 이유와 무슨 상관인가요?' 바로 이런 현상이 유튜브가 책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정보와 지식을 구분하여 정의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지혜는 구분하지만, 정보와 지식은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부분 상황에선 둘을 혼용해도 큰 문제가 다. 맥락상 의미 전달만 되면 '지혜'마저도 혼용될 수 있다. 하지만 유튜브 시청이 독서를 대체할 수 없는 이유를 전개하려면, 정보와 지식을 구분 짓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음 장은 그 차이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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