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요즘은 자기 MBTI를 모르면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다. 심지어 MBTI를 묻는 말에 모른다고 답하면, 외계 생명체 취급당하기 일쑤인 세상이다. MBTI는 이제 유행을 넘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검사를 해보았다. INTP란다. 특징을 보아하니 부족한 사회성, 자발적 아싸, 공감 능력 제로, 팩트 폭행러 등 소위 말하는 '찐따'의 모든 특성을 갖춘 MBTI였다. 오죽하면 나 자신을 INTP라고 소개할 때 표정이 차갑게 식는 사람도 있겠는가.
이런 나를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소개하면 눈을 번쩍 뜨고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풉, 네가?'라는 느낌의 추임새는 덤이다. 그도 그럴 것이 INTP가 가진 특성은 내 평상시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남들 신날 때 혼자 진지하고,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들며, 집에 화재 정도는 나야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나다. 연극배우에겐 여러 자질이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사회성과 공감 능력이 유독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가 부족하다는 평을 자주 듣곤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대에 선 내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2020년부터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올랐다. 아마추어 연극제에서 상을 들어 올린 적도 있고, 극단 내에서 연기 잘하는 단원 중 한 명으로 통했다. 자기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질과는 별개로 누구든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을 해보니 내 사회성과 공감 능력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리고 적절한 표현 방식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었다. 표현에 서툰 탓에 으레 차가운 사람으로 비친 것이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기표현에 서툴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 주변인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회사든, 모임이든, 집이든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자기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한국 전반에 퍼진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숨기도록 요구한 탓이다. 이에 익숙해진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억압하며 살아간다. 민족 단위로 자행된 가스라이팅이나 다름없다.
한편 무대 위에서는 나 자신을 억압할 필요가 없다. 체면이니 눈치니 따지면서 내 생각과 감정을 억누를 이유가 없다. 사람들은 배우가 연기를 위해 가면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우는 무대 위에서 가면을 벗고 자신의 삶을 표현한다. 내 말이 조금은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배우는 극 중 인물을 말 그대로 '연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 작품이 예술가의 삶을 담아내듯이, 배역이라는 예술 작품 또한 배우의 삶을 담아낸다. 배우에게 연기는 배역을 조각하는 예술이다.
연극을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어느 날, 여러 이유로 돌연 연극을 떠난 적이 있다. 우리는 곁에 있던 누군가를 잃고 나서야 뒤늦게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나 또한 연극을 그만두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실감했다. 연극을 통한 자기표현이 내 삶에 얼마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다행히 연극은 지나간 인연과 달리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그렇게 흑백과도 같았던 1년 6개월의 공백을 깨고 새로운 극단에 입단 신청서를 제출했다. 극단은 매년 1월 신입 단원을 받았으므로 입단까지는 5개월이 남은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내 삶에 색이 더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2024년 1월, 그토록 고대하던 새로운 극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연극패 청년'. 무려 35년간 명맥을 이어온 아마추어 직장인 극단이다. 이제부터 써 내려갈 이야기는 이곳에 새롭게 터를 잡은 이후의 이야기이다. 때로는 공연 이야기를 다룰 것이고, 때로는 극단의 일상을 다룰 것이며, 때로는 나의 고찰을 다룰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다루게 될 것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람에게 있어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명제가 연극을 하면서 발견한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