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훈 May 02. 2024

내 마음이 향한 곳

'연극패 청년' 81회 정기공연 『굿닥터』 무대


취미 연극을 들어본 적이 없는 독자라면, 아마추어 연극 활동이 수요가 적은 취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에만 50여 개의 크고 작은 아마추어 극단이 있으며, 전국으로 확장한다면 이를 훌쩍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마다 제각기 성격이 다르듯이 아마추어 극단도 제각기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아마추어 극단을 선택할 때는 극단의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극단의 성격과 다르면, 그 관계를 장기간 유지하기 어렵다.


새로운 극단으로 입단을 결심하기 전, 나는 이미 3년간 연극을 해온 터였다. 그래서 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는 세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극단을 물색했다. 첫째는 접근성이었다. 배우는 공연이 임박하면 거의 매일 하루 세 시간 이상의 시간을 연습에 할애한다. 직장인 특성상 평일엔 오후 7~8시 사이에 연습을 시작하기 때문에, 거리가 멀면 여러모로 부담이 크다. 따라서 극단의 위치가 첫 번째 고려 사항이었다.


둘째는 극단의 규모와 역사였다. 일단 규모가 작은 극단은 작품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녹록지 않다. 배우와 스태프 모집이 어려워 작품 선정에 제한이 걸린다. 소규모 인원을 필요로 하는 단막극도 매력적이지만, 대형극만이 담을 수 있는 특유의 생동감이 있다. 난 이런 생동감을 놓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양한 극을 올리기 위해서는 극단의 규모 수준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더불어 최소 1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극단을 찾아보기로 했다. 역사가 깊은 극단일수록 체계가 안정적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셋째는 연극을 대하는 소속 단원의 마음가짐이었다. 때때로 단원 간 사교나 지원금 수령이 목적인 극단이 있다. 이런 극단은 공연의 질이 관객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배우들끼리 농담 따먹기로 일관하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마치 대본 따위가 뭐가 대수냐는 듯이 배우들은 서로 낄낄대며 웃기 바빴다. 그들은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관객인 나로서는 찌푸려지는 눈살을 감출 수 없었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객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취미라 할지라도 연극은 관객에게 선보여야 하는 공연 예술이고, 극단의 최우선 과제는 관객이 만족할 만한 공연이어야 한다. 단원 간 사교나 지원금 수령은 부수적인 역할에 그쳐야 한다. 그래서 세 번째 기준이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하지만 극단 분위기를 직접 경험할 방법이 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한답시고 여러 극단을 돌아다니며 입단과 탈퇴를 반복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심 끝에 집에서 가까운 극단 몇 군데를 물색한 뒤 공연을 관람해 보기로 했다. 공연을 보면 극단 분위기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극단 중 규모가 크고 10년 이상 운영되어 온 극단은 세 군데였다. 나는 세 극단의 공연 일정을 확인 후 공연을 관람했다.


세 극단 모두 연극을 향한 열정이 뛰어난 듯 보였다. 무대는 프로 극단에 버금가는 수준이었고 뛰어난 연기력을 펼치는 배우도 다수 보였다.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연극패 청년'이라는 곳이 유독 인상 깊게 다가왔다. 해당 극단은 닐 사이먼의 『굿닥터』를 선보였는데, 그 공연은 입단 1년 미만의 신입 기수로만 구성된 '신입 공연'이었다. 비록 아마추어라 할지라도 초심자와 경험자 간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그 '신입 공연'은 다른 두 극단의 '정기 공연'에 뒤지지 않는, 어쩌면 그 이상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연극패 청년' 『굿닥터』 포스터


이는 극에 참여한 단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관객에게 부끄럽지 않을 '신입 공연'을 위해 극단 전체가 노력했음을 의미한다. 극에 참여하지 않은 단원들도 합심하여 열정과 책임으로 공연을 준비한 것이다. 『굿닥터』는 1900년대 러시아가 배경이기 때문에 무대·의상·미장센도 그에 걸맞게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극단은 프로 극단 못지않게 이 모두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물론 다른 두 극단도 좋은 공연을 선보였지만, '신입 공연'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내 마음은 점차 '연극패 청년'을 향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고민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연극패 청년' 입단을 결정하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를 제출하자 돌연 한 가지 생각에 실소가 터졌다. '내 주제에 무슨 극단을 선택하고 있냐.'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아마추어 세계의 장점이다. 프로라면 가당치도 않을 거만함을 누릴 수 있는 특혜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특혜는 입단 전까지만 해당한다. 입단하고 나면 온갖 실력자들 사이에서 나의 하찮은 자존감을 유지하기에 급급할 터였다.


나는 신청서를 제출한 날부터 입단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나비인 양 하늘거렸다. 어느덧 '연극패 청년' 23기 신입 단원 환영일이 다가왔다. 넘치는 기대를 안고 '공간'으로 향했다(극단은 연습실을 공간으로 부른다). 지하 1층에 위치한 공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계단 위에서부터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귀에 와닿았다. 한 계단씩 발걸음을 내디디며 사람들과 공간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열정적이고 따뜻하며 상냥했다.


공간에 들어서자, 모두가 나를 반기며 환영해 주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마주해본 해맑은 환영이었다. 극단은 공간에서 자체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명은 종류별로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고, 음향 기기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으며, 소품은 카테고리별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곳은 사람도 공간도 내가 그렸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열정적이고 따뜻하며 상냥했다. '연극패 청년'의 한 단원으로서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실로 기다려졌다.

이전 01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