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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May 09. 2024

첫만남 그리고 환영 공연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공간에 들어선 나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23기 이일훈'이라고 적혀있는 명찰을 받았다. 나는 명찰을 달고 빈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년에 관람했던 『굿닥터』의 배우들이 보였다. 괜스레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솟구치는 내적 친밀감에 말을 걸어볼까도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침만 삼켰다. 그들은 내가 『굿닥터』를 관람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바로 그 연극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언젠가 나의 염탐 사실을 알게 될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설렘인지 창피함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들었다.


시간이 되자 환영 공연이 펼쳐졌다. 나는 이 환영 공연이라는 개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단순히 몇 마디 말로 끝낼 수 있었던 환영을 극단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공연으로 승화했다. 그간 관성적으로 해 온 인사치레일지 몰라도, 극단 자체가 신입 단원을 예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년에 들어올 후배 기수의 환영 공연에 참여해 보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내리사랑 아니겠는가. 아직 정식으로 단원이 된 것도 아니면서, 김칫국부터 들이키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환영 공연은 두 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첫 공연은 12기 선배의 모놀로그였다. 여성연극제 시민독백대회 수상작으로, 연극 『메피스토』의 첫 등장 장면이었다. 조명이 켜지고 드러난 배우의 모습은 사뭇 놀라웠다. 분장과 의상을 전부 갖추고 진행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영 공연은 대충 준비해도 된다는 한심한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했던 것 같다. 이는 극단이 연극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는 간접 지표이기도 했다. 나는 연극이 최우선인 극단을 원했고, 극단은 이에 부합하는 듯 보였다. 오히려 나의 무의식이 극단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두 번째 공연은 21기 선배들의 단막극이었다. 연극『기형도 플레이』에서 '소리의 뼈'와 '질투는 나의 힘'을 엮어 선보였는데, 솔직한 나의 감상평은 '난해하다'이었다. 몇몇 무대 장치와 배우의 행동이 극의 맥락과 연관 없어 보여 집중력을 잃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극 중 가상의 어항을 관객에게 전하는 장면이 있었다. 관객은 공연 내내 가상의 어항을 들고 있어야 했고, 배우들은 한동안 어항과는 무관한 서사를 풀어나갔다. 나는 언젠가 그 어항이 극의 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어항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잠시 헤맸다.


심플한 『기형도 플레이』의 무대


이 외에도 나를 방황하게 만드는 몇몇 요소가 있었다. 직관적인 의미 전달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극의 이면에 숨은 서사와 관계를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관객이 관람 중에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극보다는, 관람 후에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극을 좋아한다. 관람 중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극에 빠져드는 게 우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마 턱없이 부족한 나의 예술적 소양이 나의 선호도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럼에도 짧은 단막극이 갖는 심미성은 엄청났다. 조명과 음향의 활용 방식이 눈에 띄었고, 특히 배우들이 돌림노래 하듯 대사를 번갈아 내뱉는 장면에선 혀를 내둘렀다.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대사와 신비감을 자아내는 음향과 조명 사용 방식이 한데 어우러져 눈과 귀를 만족시켰다. 연출과 배우 모두가 21기 선배, 나보다 겨우 2년 앞서 입단한 단원들이었다. 극의 미장센은 연극 경력 2년 차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출을 맡은 선배는 다른 극단에서 오랜 기간 연극을 해온 실력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재는 프로 무대에 조연출 겸 배우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


극단에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겸하고 있는 배우들이 더러 있다. 처음엔 아마추어 배우로 시작했다가 연극의 매력에 포로가 되어 프로로 전향한 것이다. 나 또한 이런 꿈을 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연극의 매력은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올가미다. 언젠가는 실력을 키워 프로 연극인이 되고 싶다는 포부도 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좋아하는 취미도 직업이 되면 괴롭다'라는 오랜 격언이다. 덕업일치란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더라.


환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극단의 대표


두 편의 환영 공연이 마무리되자, 극단의 대표가 무대로 나섰다(극단 대표는 매년 새롭게 선출되며 연임이 가능하다). 그녀는 극단의 회칙과 운영 방식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연극패 청년'의 역사는 35년이다. 프로 극단도 여러 사정으로 오래 유지하기 힘든 곳이 이 바닥이다. 이런 생태계에서 아마추어 극단이 오랜 역사를 보유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집단이건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살아남으면 자연스레 체계가 잡힌다. 의도와 무관하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점차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바로 이 안정된 체계가 내가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고, 극단은 안정적인 체계하에 작동하는 듯 보였다.


신입 오리엔테이션의 모든 순서가 끝나고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 초면인 사람과의 대화를 힘들어한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다. 그러나 비록 초면일지라도, 우리 사이에는 대화를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바로 '연극'이 그것이다. 나는 연극으로 이어진 그 사람들과의 대화가 유난히 즐거웠다. 심리적 유대감이 초면이라는 장해물을 걷어낸 것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귀갓길에 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날의 일을 되새겨보았다. 근래 들어 가장 두근거리던 귀갓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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