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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May 16. 2024

이론 교육에 대한 나의 단상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처음 신입 교육 커리큘럼을 확인했을 때는 생각보다 짧은 교육 과정에 적잖이 놀랐다. 좋게 말하면 정말 필요한 교육으로만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었고, 반대로 말하면 이 정도로 과연 충분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있어 이론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간엔 '일단 행동하라'라는 표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나로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조리 도구의 사용법 숙지 없이 대뜸 요리부터 한다고 생각해 보라. 손가락의 운명을 운에 맡기는 꼴이다.


물론 연극은 요리처럼 위험한 도구를 사용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론 교육의 목적은 학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론 교육의 핵심 목적 중 하나는 '정신 무장'이다. 우리는 '힘들다'의 개념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연극 준비 과정 중 겪게 될 고충을 수없이 말해도, 사람들은 할머니 댁 뒷산 산책 정도로 생각한다. 대신 체계적인 이론 교육은 연극을 대하는 극단의 자세를 우회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단순히 "우리 극단은 연극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고, 여러분이 연극을 시작하면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심도 있는 이론 교육 한 번이 더욱더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간혹 연극을 초등생 시절 학예회 수준으로 생각하고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물론 아마추어 성인 극단 중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올리는 곳도 많다. 사교도 하는 연극 집단이 아닌, 사교를 위한 연극 집단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풍문으로 들었던 '연극패 청년'은 이런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연극패 청년'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극단의 정체성을 신입 단원에게 명확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극단은 학예회 수준의 극을 지양한다. 여러분도 우리 극단의 정체성에 맞게 마음가짐을 갖추라.'


체계적인 이론 교육은 신입 단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 과정에서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나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들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 그러나 떠나려는 사람보다는 곁에 남은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 매정하게 들리겠지만, 극단 스스로 정체성에 변화를 줄 것이 아니라면 떠날 사람은 어차피 떠나게 되어 있다. 그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현직 배우이신 '신황철' 고문의 강의


'연극패 청년'의 신입 교육 커리큘럼은 2주 코스였는데, 오리엔테이션과 모놀로그 발표를 제외하면 총 4회의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회당 평균 약 3시간이 소요되었으므로 어림잡아 총 12시간 분량의 교육이었다. 나는 교육 시간을 기존보다 약 50% 늘린 18시간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18시간 분량의 교육을 누가 담당하느냐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분야이건 간에 이론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 단원 누구나 교육을 진행할 수 있도록 자료를 갖춰 두면, 그 자료는 두고두고 장기적인 활용 가치를 지닌다. 처음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부족한 교육 시간과는 별개로, '연극패 청년'의 강의 하나하나는 밀도가 높다. 아마추어 배우라고는 믿기지 않을 수준의 전문성과 열정을 지닌 단원들도 다수 있다. 그 탓에 짧은 교육 시간이 더욱 아쉬움으로 다가온 듯하다. 나는 관심사가 생기면 관련 도서나 논문을 읽으며 파고드는 성격이라, 교육의 내용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론은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치에 따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도 한다. 마치 같은 책을 읽어도 나이와 시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것과 유사하다. 새로운 시각은 발전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이론의 중요성을 다루느라 너무 '이론'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다. 한 번쯤은 이론에 관한 내 생각을 다루고 싶었다. 그만큼 중요하고 고찰할 만한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실습의 중요성을 간과한다고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실습 또한 이론만큼 중요하다. 단지 요즘 세상을 둘러보면, 모두가 이론의 중요성을 잊고 사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론 없는 실습은 위험하고, 실습 없는 이론은 나태하다. 연극이라고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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