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교육 커리큘럼에는 예기치 못한 복병이 하나 숨어 있었다. 2PM의 곡 『우리집』에 맞춰 춤을 추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극배우는 몸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어야 하므로, 댄스는 근육을 이완시켜 주고 긴장을 풀어준다는 점에서 유용할 것이다. 또한 서로 낯이 익지 않아 어색해진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무대 공포증을 완화해 줄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거부감과는 달리, 커리큘럼에 댄스가 포함된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신입 교육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면, 신입 단원들은 삼삼오오 팀을 꾸려 신입 발표회를 준비해야 했다. 신입 발표회는 약 15분 분량의 단막극을 한 달 정도 준비한 후 공연하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단막극만이 아니었다. 기수 전원이 강의 때 배우게 될 댄스 또한 발표해야 했다. 아무리 댄스가 연극에 도움 된다지만, 선배 단원들 앞에서 발표까지 해야 한다니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걸 지칭하는 유구한 전통의 한 단어가 있다. 재롱잔치.
더군다나 우리가 춤을 추게 될 곡은 『우리집』이었다. 가사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아무도 모르게 우리 집으로 가자고 유혹하는 내용이다.단둘이몰래 집으로 가자는 이유가 라면이 두 개뿐이어서는 아닐 테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보일 댄스는, 수컷 공작이 암컷의 간택을 받기 위해 추는 춤사위나 다름없었다. 내 나이가 40이다. 유혹의 춤사위를 선보이기엔 불혹은 조금 늦은 나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춤을 춰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제가요? 왜요?'
수컷 공작이 꼬리를 펼치듯이
2024년에 접어들면서 결심을 하나 했다. '반골 기질 좀 낮추고 납득하기 힘든 것도 군말 없이 해보자.' 이래서 결심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일단 모든 것을 유보해야 한다. 하지만 어쩌리. 결심은 결심이고, 이미 극단의 일원이 되기로 한 이상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댄스 강의를 진행한 분은 하늘 같은 11기 선배였다. 그분은 댄스 동작을 전수하면서 여러 번 외쳤다. "자신감 있고 섹시하게!" 하긴 앞으로 나이 먹을 일만 남았는데, 지금이야말로 남은 인생 중 가장 자신감 있고 섹시해 지기 쉬운 나이였다. 고로 다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의 춤사위로 세상을 홀려 버리겠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나의 춤이 세상까진 아니어도 단원 몇몇 정도는 홀렸던 것 같다.
2. 겸손은 어려워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연극패 청년' 입단 전 다른 극단에서 3년간 활동했다. 나는 나이 지긋한 아버지나 할아버지 역을 자주 맡았는데, 도무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내 '꼰대력'이 한몫한듯하다. 그래도 노인 분장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건 크나큰 장점이다. 아마추어 극단의 배우는 특수 분장이 아닌 한 모든 분장을 직접 하는데, 노인 분장도 특수 분장에 해당하므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인 분장이 익숙한 나는 혼자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15기 선배가 진행한 분장 수업
15기 선배가 진행한 분장 이론 수업을 마치고, 노인 분장을 직접 해보는시간을 가졌다. 노인 분장이라... 내 전문 분야가 아닌가. 나와 동기들은거울 앞에 나란히 서서분장을 시작했다. 노인 분장경험이 꽤 있던 나는 혼자서 도구를 척척 찾아가며 분장을 해나갔다. 현란하게 움직이던 내 손놀림은 무언의 메시지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보고 있느냐, 이 초심자들아. 이게 바로 경험자의 붓질이다.' 분장을 끝마치고 의기양양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내 눈빛은 금세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들 분장 경험이 풍부하기라도 한 듯 너무 잘했던 것이다.
늘 비판해 오던 더닝-크루거형 인간이 바로 나였다니! 이래서 사람은 평소 자중하고 겸손해야 한다. 물론 '보고 있느냐, 이 초심자들아. 이게 바로 경험자의 붓질이다'라는 식의 적나라한 생각을 한 건 아니다(진짜 아니다). 다만 노인 분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감을 가질 수준의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자신감은 다방면으로 도움이 되지만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과도한 자신감은 부족한 자신감만큼이나무익한 법이다.
노인 분장, 시간 관계상 머리 분장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3. 모놀로그
신입 교육의 백미는 역시 모놀로그 발표다. 약 3~5분 동안 단원들 앞에서 독백 공연을 하면 되었는데, 모놀로그 발표는 모든 신입 단원의 필수 이수 과정이었다.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할 경우엔 따로 모놀로그를 촬영하여 제출해야 했다. 그만큼 모놀로그 발표가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모놀로그 발표는 초심자에게 있어 생애 첫 공연이라 할 수 있고, 신입 단원은 이를 기점으로 일반인에서 아마추어 배우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전 극단의 신입 훈련에서 모놀로그를 발표한 경험이 있다. 극단이모놀로그 대본 여러 개를 선택지로 배포하면, 신입 단원은 마음에 드는 대본을 골라 준비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연극 초심자에게 모놀로그 발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3~5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홀로 공연을 이끌어가는 것은 경험자에게도 부담이다. 그래서 모놀로그 준비 기간에는 기존 단원이 일대일 멘토가 되어 신입 단원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멘토는 조언자이자 연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덕분에 나는 생애 첫 공연을 별 탈 없이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연극패 청년'의 모놀로그 발표는 의외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극단은 모놀로그 발표일만 공지할 뿐, 그 외 다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좋게 말하면 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초심자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기는 것이기도 하다. 신입 단원은 대본도 직접 찾아야 하고 연기도 직접 구상해야 했다. 이때발생할 문제점은 자명하다. 대다수의 신입은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일부를 발췌할 것이고, 그들은 그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흉내' 낼 것이기 때문이다(내 예상은 적중한다).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나 스크린 속 배우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는 건 모방이 아닌 표절이다. 이런 부분은 앞으로 개선이 필요하다고생각한다.
나는 소위 '중고 신입'이었기 때문에 모놀로그가 부담스럽진 않았다. 게다가 대본에 제약이 없었으므로 창작극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나는 평소 아이디어를 메모해 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방백 형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 20분 분량의 단막극을 써본 적은 있지만, 공연으로 올릴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창작 모놀로그는 나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발표가 가능했다. 나는 이번이야말로 내 세상을 바깥에 선보일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별에 새기다』가 탄생한다.
『별에 새기다』의 '나'를 연기 중인 나
별에 새기다
와... 여기는 별이 진짜 잘 보이네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공기도 맑고 하늘도 예쁜데, 아니 뭐 그리 바쁘다고 도시에만 처박혀 있었는지 참. 앞으로는 시외로 종종 나와야겠습니다. 또 이렇게 말해 놓고 안 나올 게 뻔하지만요. 그러니 오늘은 기왕 온 김에 별이나 실컷 구경하다 가야겠습니다. 아, 혹시 그거 아세요? 저 별빛이 우리 눈에 닿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대요. 가까운 별은 오 년이 걸리기도 하고, 먼 별은 백억 년이 걸리기도 한다네요. 백억 년이라니, 상상이 되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별을 볼 때는 아주 먼 옛날, 그것도 우리 인류가 탄생하기도 한참 전의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정말 신기하죠. 이게 반대로 말하면, 지금 우리 모습이 저 별에 가닿을 때도 똑같은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악수를 하면, 어느 별에서는 십 년 후에, 또 어느 별에서는 만 년 후에, 그리고 또 어느 별에서는 백억 년 후에 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거죠. 지금 이 순간이, 저 하늘에 영원히 새겨지는 겁니다. 한때 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어요. 온 세상이 저를 공격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은 제가 문제였던 건데... 아무튼 그렇게 화내는 모습이 저기 어딘가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 제 모습이 저 별들 사이를 가로질러 영원에 기록된다면, 이왕이면 웃는 얼굴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사이) 언젠가 저 별에 아로새겨질 이 순간을 기억하면서요.
준비 기간이 짧았던 만큼 연기를 충분히 다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타인이 창조한 세상이 아닌, 직접 창조한 세상에 살아보는 것은 정말이지 남다른 감동을 주었다. 나의 창작극이 단원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잘했든 못했든 박수갈채야 다 받는 거니까. 그렇지만 직접 창조한 세상 속 인물이 되어, 그를 현실에 드러냈을 때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모놀로그 수준을 벗어나 직접 쓴 단막극이나 장편극을 올려 보고 싶다. 다른 배우들과 더불어 나의 세상을 구현한다라... 생각만으로 짜릿하다. 과연 그런 날이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