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간의 훈련 과정을 마치면, 마지막으로 신입 발표회를 준비해야 했다. 발표회에서 신입 기수는 15분 분량의 단막극과 댄스 강의 때 배운 춤을 선보여야 했다. 준비 기간은 한 달. 단막극 한 편준비하기엔 넉넉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댄스가 문제였다. 유년 시절 이후 남들 앞에서 춤춰 본 적도 없거니와, 섹시한 노래에 맞춰 몸뚱이를 굴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동기들을 가림막 삼아 자존심을 지키자는 양심 없는 계획을 세웠었다. 나는 오로지 단막극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단막극은 총 세 팀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단막극의 연출은 22기 선배 단원들이 맡았는데, 우리 기수보다 겨우 1년 앞서 입단한 선배들이었다. 혹자는 고작 1년의 연극 경험으로 연출이 가능할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시스템이 만족스러웠다. 풍부한 무대 경험과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배우라 할지라도, 연출을 맡으면 고배를 마시는 사람이 많다. 영화 및 다른 공연 예술계를 떠올려 보라. 훌륭한 연출이 훌륭한 이유는 연기력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훌륭한 배우가 좋은 연출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배우와 연출은 제각각 다른 자질이 요구되는 것이다.
내가 이전 극단에서 활동했을 땐 연출이 단 한 명뿐이었다(실제 한 명이 더 있었지만, 이벤트성 공연만 연출했다). 당시 연출은 내가 활동한 3년 동안 홀로 모든 공연을 담당했다. 분명 연출의 자질이 보였던 다른 단원이 있었음에도, 극단은 연출을 추가로 양성할 계획이 없어 보였다. 극단에서 대체 불가 자원은 위험 요소다. 연출이 번아웃이라도 겪는다면 와해는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담이 적은 단막극 등을 활용해 연출 경험을 어느 정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연극패 청년'은 연출 양성 시스템이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단원 모두에게 연출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신의 연출력(넓은 시야, 배우 섭외력, 소통 능력 등)을 가늠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것에 더욱 흥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면, 해당 분야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그에 따라 좋은 결과를 낸다. 그렇게 단원 개개인이 재능을 발휘하여 공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연극패 청년'엔 있었던 것이다.
신입 휸련 수료증과 개근상품을 받는 나
23기 신입 모놀로그 발표를 마치자, 단막극 연출을 맡은 22기 선배 세 분이 무대로 나섰다. 함께 작품을 준비할 신입 단원을 호명하기 위해서였다. 연출들은 신입 기수의 모놀로그를 보고 각자 원하는 배우를 점찍은 후, 회의를 거쳐 각자 원하는 배우를 정했다. 나는 모놀로그를 마치는 순간부터 어느 팀에 속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연출을 맡은 세 선배 중 한 분이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분의 행동과 눈동자에서 투명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연출이 나를 호명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연기를 좋게 봐주셨구나'라는 감사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추후 밝혀진 바로는, 내가 모놀로그에서 연기한 배역과 본인이 구상한 배역이 맞아떨어져 보였기 때문이란다. 참 나, 난 내가 잘해서 뽑힌 줄 알았는데. 내게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관찰력은 있지만, 자기 수준을 파악하는 관찰력은 부족한가 보다. 그래도 모든 신입 단원 중 첫 번째로 호명된 덕분에, 남들이 호명되는 동안 '선택받지 못한 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순 있었다.
마침내 모든 배우가 호명되어 팀별로 무대에 섰다. 나는 함께 극을 조각해 나갈 동료들을 살폈다. 남자 배우 셋, 여자 배우 하나 그리고 연출로 구성된 우리 팀은 하나같이 말수가 적었다. 다른 팀은 전부터 알고 지내기라도 한 양 왁자지껄한데, 우리 팀은 흐릿한 얼굴로 칙칙한 기운을 퍼트리고 있었다. 당시 배우 한 명 빼고는 전부 남성이었는데(추후 여성 조연출이 합류한다), 군대스러운 칙칙함이 한몫한 듯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성비가 맞는 그룹은 특유의 생동감이 있다. 보다 화사하고, 보다 기운차며, 보다 싱그러운, 원인 모를 화기애애함이 감돈다. 더군다나 우리 팀은 평균 연령마저 가장 높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칙칙함이 한껏 뿜어져 나온 것이다. (사진만으로도 분위기의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지만 공개할 수 없어 답답하다.)
내향적인 사람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걸 쏟아붓는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내향인들은 보다 간접적인 형태로 자기표현 욕구를 해소하는 경향이 있다. 평소 조용한 사람이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실제 극단엔 내향적인 사람의 비중이 더 크며, 외향적인 사람조차도 스스로 억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우리 팀원들에게서도 이런 성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우리 팀에는 무대를 찢어버릴 날만 기다렸던 짐승 한 마리가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