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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Jun 13. 2024

신입 발표회까지의 여정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돌의 이름』팀은 연출진 두 명, 오퍼 두 명, 그리고 배우 네 명으로 이루어졌다. 팀원 대부분이 말수가 적고 내향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인지, 어색한 연습 분위기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연습 2주 차에도 나와 눈이 마주친 배우의 동공에서 흔들림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무대 밖에서 봤다면, 어색함이 동공 지진을 넘어 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을 것이다. 특히 나는 어색할 때 손가락을 모스 부호 보내듯 튕기곤 한다. 이런 어색한 행동을 그대로 안고 무대에 오른다면, 관객은 배우의 어색함을 고스란히 느낄 게 분명했다.


배우는 인물 간 호흡과 더 나은 연기를 위해 작품 내외로 친분을 유지해야 한다. 연극의 본질은 결국 '관계'이다. 그리고 관계의 근간은 '소통'이다. 배우 간 소통 창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극 중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최소 연극을 준비하고 공연하는 기간만큼은 허심탄회한 영감 공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영감의 전달도, 영감의 수용도, 심지어 영감의 거절도 친분에 기반할 때 더욱 부드럽게 이루어진다. 현실 관계가 인물 간 관계를 넘어 극 완성도에 핵심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다.


배우 및 연출진 단체 샷


일례로 나는 극 중 남편 역을 분한 적이 있다. 아내 역을 맡은 배우와 나는 사무적인 대화 외에는 일절 교류가 없는 사이였다. 극 중엔 눈에 띄는 애정 행각이나 낯 뜨거운 사랑 표현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부부라면 누구나 할 법한 눈 맞춤이나 소소한 신체접촉에도 몸서리를 쳤다. 처음엔 그녀의 방어적인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저 연기일 뿐인데,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모습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물론 내 외모가 도무지 남편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꼬락서니는 우리 부모님에게 따질 일이고, 뭐가 되었든 공연은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 연출은 배우 간의 부족한 친분을 지적했다(모를 지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연출은 둘이 함께 식사해 볼 것을 권유했다. 연출의 노련함을 알고 있던 나는 의심 없이 권유를 받아들였다. 나와 아내 역의 배우는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하여 서로를 알아갔다. 또한 평소 연습 중에도 일상 대화를 나누려 노력했다. 그렇게 2주가량이 지나자, 나를 대하는 아내의 연기가 한결 편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대 위에서 내가 다가가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던 그녀가, 오히려 먼저 다가와 손을 내미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현실 친분이 가상의 관계 사이에 놓여있던 벽을 허문 것이다.


그런데 『돌의 이름』은 단막극이었다. 단막극은 정극에 비해 연습 기간이 짧은 탓에 친분을 쌓을 기회가 부족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출과 예술가를 분한 배우(이하 예술가)가 큰 역할을 해 주었다. 연출은 팀원들이 모이면 짧게나마 잡담 시간을 가지도록 안배했다(보통 연습실에 모이면 바로 기초 훈련에 돌입하는 경우가 많다). 잡담이란 것이 별 시답잖은 시간 낭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 또한 수년 전만 해도 잡담을 무의미한 트래쉬 토크로 치부했다. 잡담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은 하나같이 무가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담의 참 목적은 정보 교류가 아닌, 대화 중 부지불식간 쌓이는 친분이다. 심지어 정보 교류도 이 친분이 밑거름될 때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더불어 예술가도 팀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예술가는 공간에 도착하면, 실제 열정의 행위 예술가처럼 댄스 연습을 주도했다(신입 발표회 때 선보일 그 댄스가 맞다). 나는 댄스는 포기하고 다른 동기들을 희생양 삼아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두세 번의 춤사위를 펼치다 보니 댄스가 몸에 익기 시작했다. 게다가 춤을 추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내가 댄스에 꽤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자 댄스에 흥미가 붙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연습 전 모두가 신나는 음악에 춤을 추니 연습 분위기도 덩달아 끓어올랐다.


댄스 연습 중인 남배우들, 거울 너머 연출이 보인다


이렇게 연출의 노력과 예술가의 주도력 덕분에 팀 분위기는 나날이 좋아졌다. 일상에서의 친분은 자연스레 소통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배우들의 연기 궁합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부인 역의 배우(이하 부인)는 처음의 쑥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극의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99년생인 그녀는 연습 초반 다른 팀원들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다. 연습이 끝나면 말 걸 틈도 없이 쌩하고 사라진 탓에 서로 알아갈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편안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부인은 무대를 휘어잡는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초반 부인을 향한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극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며 무대를 장악했다.


부인은 연습 중에 즉흥 연기를 자주 활용하였다. 그녀의 즉흥 연기는 인물의 성격과 극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정도여서, 연출은 마음껏 즉흥 연기를 펼치도록 돋우어 주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배우들은 부인연기에 걸맞게 즉흥 연기를 구상해야 했다. 대화의 기본은 적절한 반응이므로 당연한 작업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주어진 절차대로 따라 하는 무미건조한 연기가 아닌 나만의 감수성을 녹여낸 창의적인 연기를 좋아한다. 이런 내가 즉흥 연기의 구상 과정을 누구보다 즐겼다는 건 독자들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재벌을 죽일 듯이 바라보는 부인, 눈빛 하나로 지구를 정복할 기세다


이렇게 우리 팀은 단막극과 댄스 모두를 착실하게 준비해 나갔다. 그러다 어느 날 댄스 강의를 진행했던 선배가 신입 기수의 연습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공간을 방문했다. 응원도 할 겸 댄스 대형을 짜기 위해서였다. 신입 기수는 그간 연습했던 댄스를 별로 선보였다. 모든 팀의 댄스를 마치고, 열다섯 명 남짓한 단원 중 센터에 서게 될 단원 세 명이 발표되었다. 그 셋은 우리 팀의 예술가, 부인, 그리고 나였다. 선배는 댄스 대형 발표를 마치고 몇 마디 조언을 덧붙였다. "아직 기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힘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원하는 느낌에 가장 근접한 분은 일훈 님이에요."


비겁하게 전우들 등짝 너머에서 깨작거릴 계획이었던 나는, 춤으로 인정도 받고 센터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 팀은 연습 내내 진취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는데, 이런 분위기가 단막극과 댄스 둘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좋은 팀 분위기를 위해 팀원 모두가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연출진과 예술가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맞다. 나는 이 점을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폭탄이 부실하면, 도화선은 하찮은 연기와 함께 짧은 기대를 마감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팀원 하나하나가 매 순간 열정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어느덧 신입 발표회 당일이 되었다. 공연 날 아침부터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우리는 일찍부터 공연 생각에 몸이 근질거렸다. 신입 발표회는 경쟁을 목적으로 한 대회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경쟁의 불씨를 숨겨 놓기 마련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자기 팀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더 자주 회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나 또한 다른 팀과 우리 팀의 비교를 의도적으로 함구했지만, 내가 쓰는 글에서만큼은 솔직해지고 싶다. 나는 우리 팀이 더 좋은 공연을 올릴 것이라 직감했다. 그리고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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