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일훈 Jun 06. 2024

배역 없이는 배우도 없다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우리 팀이 발표회에서 공연할 작품은 김태현 작가의『돌의 이름』이었다. 공연장 한복판에 떨어진 돌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찰을 끌어내는 블랙코미디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코미디보다 정극을 좋아한다. 코미디는 인위적으로 과장된 연출과 연기가 접목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현실을 더욱 가깝게 투영하는 연출과 연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도 블랙코미디 장르 특성상 광대극에 가까운 과장은 적기 때문에, 첫 합동 공연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배역은 '예술가', '재벌', '재벌 부인', '관리인' 총 넷이었다. 대본을 읽어보니 예술가를 제외한 나머지 역은 연기 방식이 단조로워 보였다. 반면 예술가는 배우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의성을 녹인 자유분방한 연기를 선호하는 나는 예술가 역이 탐났다. 팀에 여배우는 한 명이었으므로 재벌 부인 역은 확정이었고, 다른 두 명의 남배우가 예술가를 사이에 둔 잠재적 경쟁자였다.


그러나 정기 공연이 아니었기에 따로 오디션을 진행하진 않았다. 대신 연출이 배우마다 어울리는 배역을 미리 정해놓은 후 안내했다. 연출은 모놀로그 발표 전부터 신입 단원들을 살피며 이미지 캐스팅을 완료해 두었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출의 마음속에 담아 둔 배우들을 전부 섭외할 수 있었다. 발표회를 맡은 연출이 총 세 명이었으므로 각자 원하는 배우가 겹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 팀 연출은 원하는 배우를 콕 집어 섭외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이것이 행운인지는 끝에 가봐야 알겠지만).


어색했던 첫 스탠딩 리딩, 레서판다가 보이는 건 착시이다


연출은 재벌 역으로 나를 점 찍어 두었었다. 그런데 막상 배우 섭외를 완료하니 약간의 고민이 생겼던 것 같다. 재벌 부인과 관리인 캐스팅은 단번에 통보한 반면, 나와 다른 배우 한 명에게는 첫 리딩 전까지 예술가와 재벌 모두를 준비하라 일렀기 때문이다. 예술가 역에 욕심이 났던 나는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벌보다 예술가 역에 집중하여 리딩을 준비했다. 더군다나 재벌과 비슷한 배역을 여러 번 경험해 본 터라 따로 준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망의 첫 리딩 날, 예술가와 재벌을 준비한 나와 다른 배우 한 명은 두 배역을 번갈아 가며 리딩했다. 두 번의 리딩을 마치고 연출과 조연출은 상의를 위해 연습실 밖으로 나섰다. 연출진이 자리를 비운 사이 홍일점이 내게 물었다.

"일훈 님은 두 배역 중 뭐가 하고 싶으세요?"

"저는 두 배역 중 뭐가 돼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비열하게 속내를 숨겼다. 그런데 속마음을 들킨 걸까? 그녀가 다시 말했다.

"왠지 일훈 님이 예술가 할 같아요."

그에 이어 다른 남배우 둘도 나란히 말을 보탰다.

"저도 왠지 그럴 것 같아요."


내 인생에는 한 가지 불가해한 불가항력이 운명처럼 작동한다. '주변인 모두가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면, 그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아하니 조건은 성립되었다. 이제 확인만이 남았다. 어느덧 연출진이 상의를 마치고 공간으로 들어섰다. 연출은 배우진이 혹여 상처라도 받을까 봐 조심스럽게 결과를 발표했다. "예술가를 연기하실 분은...." 내 인생의 운명적 불가항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캐스팅 결과가 아쉽다며 의기소침할 순 없는 법이다. 실제 이런 배우들이 더러 있는데, 우울증이라도 걸린 건 지 일주일 이상 뚱해 있기도 한다. 심할 땐 연습실에 불이라도 지를까 추적감시라도 해야 할 판이다. 솔직히 옆에서 지켜보기에 썩 유쾌한 광경은 아니다. 그래서 재벌에 캐스팅된 나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우렁차게 답했다. 대본을 펼쳐 다시 예술가 대사를 보니, '흠.... 이제 보니 예술가 완전 구린데? 재벌이 낫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생각을 선택했다.


『돌의 이름』연습 장면, 사진만으로 각 인물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나는 내 배역과 긴밀한 사이가 되려고 노력한다. 배역을 준비하는 기간만큼은 그 인물을 세상에 둘도 없는 지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비록 가상의 인물일지라도 배역은 연기되는 순간 현존 인물이 된다. 이때 배역과 배우의 관계만큼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는 세상에 없다. 이는 나만의 연기 철학이라던가 예술관과 같은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단지 연극을 하면서 체득한 경험일 뿐이다. 연극을 접한 이래 다양한 감정의 파고를 겪었지만, 마지막 공연 후 배역을 떠나보낼 때만큼 강렬한 감정은 없었다. 나는 훗날 맞이할 필연적 이별을 잘 알기에 배역과 긴밀한 사이가 되고자 한다.


배역과의 작별 중 어느 하나 아쉽지 않은 이별은 없었다. 독자들도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나면, 잘 해주지 못한 후회가 밀려올 때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역과의 작별의 순간에도 비슷한 후회가 찾아오곤 한다. 더 잘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그런데 배우가 배역에게 더 잘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수밖에. 아마추어 수준의 부족한 연기력이지만, 배역이 최선의 모습으로 현실에 드러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듯 내가 배역과 긴밀한 사이가 되려는 이유는 아쉬움 없는 홀가분한 작별을 위해서이다. 언젠가 이날을 추억했을 때, 이런 한 마디로 회상할 수 있도록. '그때는 참 좋았지.'


내가 캐스팅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나의 정체성은 직장인이 아닌 배우이다. 사람들은 보통 배역이 배우를 매개로 현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모른다. 실제 배우는 배역 없이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 배역이 배우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듯, 배우 또한 배역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시절인연과도 같은 관계에서 캐스팅 결과에 연연할 새가 어디 있겠는가. 배역의 삶을 더 알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돌의 이름』의 배역이 정해진 순간부터, 비록 시한부일지언정 나와 재벌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렇게 모든 배역이 정해지고 『돌의 이름』팀은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한다. 나는 계획에 의존한 연기보다 즉흥적인 아이디어에 연기를 맡기는 편이다. -글도 첫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내가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나를 기다린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런 순간의 아이디어들은 나를 연습에 빠져들게 하는 도파민이 된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다른 배우들과 조율하고 접목했을 때의 짜릿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걸으며 보게 될 풍경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 풍경이 전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이전 06화 드디어 단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