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주의적 언어관 비판
나는 언어에 관심이 많다. 보통 언어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 사람들은 외국어 공부 등 언어의 실용적인 측면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는 언어의 측면은 조금 더 본질적인 것에 가깝다.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 언어가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 등 언어의 학술적인 측면이 나의 주된 관심사이다. 즉, 언어보단 언어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언어철학은 사람들 사이 인기 있는 대화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를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 부류는 언어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절대론자'들이다. 이들은 언어가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완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 부류는 언어의 완전성에 회의적인 '상대론자'들이다. 이들은 언어가 인류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와 맞물려 유기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후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나는 인간의 언어가 이미 완전하다거나, 완전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내 입장을 명확히 하면 이렇다. 언어는 특정 기준으로 완전성 여부를 평가하는 대상이 아닌, 인류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 하며 함께 진화하는 대상이다. 진화에 완전과 불완전의 구분은 없다. 단지 현 상황에 맞게 최적화되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의 삶 깊숙이 존재하며, 마치 장 내 미생물처럼 인간과 호혜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칼럼을 통해, 언어가 완전하다고 믿는 '절대론자'들의 논리가 가진 취약성을 다룰 것이다.
언어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펼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언어 자체는 완전하지만, 인간이 불완전하므로 언어가 불완전하게 사용된다.' 물통 안 물은 깨끗한데 필터가 더러워서 더러운 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가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애초부터 인간과 언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물통과 필터는 본디 하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언어가 마치 인류라는 테두리 밖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아브라함계 유일신교의 신념과 유사한데, 신 또한 인류의 테두리 밖에서 독자적으로 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언어는 인류라는 필터 없이 사용된 적이 없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도, 지금 창문 밖 저 멀리서 들리는 대화 소리도, 심지어 언어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순간에도 인류가 반드시 개입한다.
인류라는 종의 불완전성 여부 또한 중요하지 않다. 인류와 언어의 분리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인류의 불완전성이 언어의 불완전성을 야기한다는 주장은 성립 불가하다. 게다가 인간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주장부터가 자기모순이다. 불완전한 자기 자신이 내세운 주장도 필연적으로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절대론자의 기저에 숨은 보편 심리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세상 밖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는 존재로 상정한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을 불완전한 인류에서 제외해야만 완전성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대상의 신격화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그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고관에서 시작한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언어와 인류의 불가분성을 증명할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증명할 필요 없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걸 증명할 수 있나요?' 다시 말해 언어와 인류의 불가분성은 현실 그 자체이자 현존하는 현상이다. 존재는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현실의 일부이지, 논리적 입증을 통해서만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다. 현실에서 매 순간 드러나는 현상은 분석 대상이 될 순 있어도 증명 대상이 될 순 없다. 이는 지구 평평론자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다.
유사 이래 언어는 단 한 번도 인간을 벗어나 작동한 적이 없다. 인류의 테두리 밖, 수컷 언어와 암컷 언어의 교미를 통해 우리 인간의 언어가 탄생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인간의 부산물이며,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인류의 테두리를 벗어난 객관적 실체를 다루고자 했던 물리학도, 현대 물리학에 이르러서는 실체가 인류(관측자)의 테두리 안에서 상호작용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심지어 물리학은 인류의 탄생 이전의 것들을 탐구한다. 하물며 인류에 의해 탄생한 언어가, 인간의 불완전성에도 인류의 테두리 밖에서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완전한 언어가 인간에게 영향을 받아 불완전해진다면, 이는 이대로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다. '완전'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완전'이 인간의 영향으로 '불완전'해진다면, 이는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즉, '언어 자체는 완전하지만, 인간이 불완전하므로 언어가 불완전하게 사용된다'라는 주장은 역설적으로 언어의 불완전성을 내포한다. 완전성을 더 강력하게 주장할수록, 불완전성을 더 강력하게 옹호하는 아이러니다.
또한 언어는 우리를 현혹한다. 언어는 마치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것들이 실존할 수 있는 것처럼 눈속임한다. '숫자의 끝'을 떠올려 보라. 떠올릴 수 있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도 숫자의 끝을 떠올릴 수 없다. 인간의 완결 욕구로 인해 현기증이나 답답함마저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창조하고 이를 대화에 이용할 수 있다. 숫자의 끝은 존재할 수 없지만, '숫자의 끝'이라는 언어적 표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숫자의 끝' 외에도 무존재가 언어의 힘을 빌려 존재를 위장하는 경우는 흔하다. 그 예시를 나열하자면 백과사전을 집필해도 페이지가 부족할 것이다. 우리가 '숫자의 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실재하는 것은 의미 그대로의 숫자의 끝이 아니라 '숫자의 끝'이라는 기표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대상의 실재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언어의 완전성'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백과사전에 들어갈 단어 중 하나이다. '언어의 완전성'도 단순 기표일 뿐, 일대일로 대응하는 대상을 가지지 않는 비실재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언어가 완전하다는 본질주의적 언어관은 플라톤의 보편자나 유일신교의 신처럼 비현실적 담론에 불과하다. 이들은 경험적으로 감각할 수도, 현실에서 드러낼 수도 없는 관념론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완결 욕구를 지니는데, 이런 욕구는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구분하도록 부추긴다. 그래서 언어의 상대주의적 관점이라 할 수 있는 구성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주의적 관점은 세상을 원인과 결과의 경계가 모호한 하나의 그물망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는 개인의 심리적 불편함이 언어가 완전해야 할 이유가 될 순 없다. 현존하는 세상은 개인의 기분 따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념은 무의미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삶을 지속할 동력을 얻기 위해 신념을 붙들고 살아간다. 그래서 '언어의 완전성'이라는 신념의 목적이 삶의 동력이라면, 나는 이를 지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언어가 완전하다는 명제가 절대적 사실인 듯 오도하는 상황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는 마치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온몸에 두르고,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는 것과 유사하다. 심지어 그 신념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에도 말이다.
오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언어가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니다. 언어의 완전성에 회의를 가지는 것이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언어는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언어가 완전하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현존하는 것은 단지 존재한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네트워크 속 한 지점이 일시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라는 점에서 완전과 불완전을 초월한다. 언어 또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