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자본 중심주의 비판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 유튜버의 흥미로운 주장을 봤다. 꽤 긴 내용이었지만 논지는 '당신이 손님으로서 좋은 대우를 받고 싶으면, 자신의 가치를 높여라'였다. 해당 명제만 봤을 때는 나름 타당한 주장처럼 보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타인도 자연스레 우리를 사랑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맥락을 들어보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유튜버의 핵심 주장은 '식당에서 친절한 대우를 받고 싶으면, 돈을 많이 벌어 비싼 식당에 가라'였다.
나는 이 주장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이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댓글에선 치열하게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중 가장 힘을 얻는 주장은 '거지 근성을 가진 인간들이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될 생각은 안 하고, 사회적 환경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한다'라는 말이었다. 댓글을 달지 않는 나였기에 반박을 남기진 않았지만, 해당 발언은 오랜 기간 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위 유튜버와 댓글러의 주장을 뒤집어 다시 표현하면 이것이다. '돈이 없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돈이 없는 사람 잘못이다.' 이는 우리가 상호 간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예의를 자본의 영역으로 옮겨 놓겠다는 선언이다. 어느 순간부터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는 것을 넘어, 뭐든지 이해되는 세상으로 변질된 듯하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결코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유시장경제 사상가인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이 뭐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본도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주장을 전에도 접한 적이 있다. '돈을 받은 만큼 맡은 일만 하면 된다. 손님 응대에 있어 굳이 친절할 필요는 없다.' 이 또한 비슷하게 인간이 서로에게 갖춰야 할 예의를 자본의 영역으로 옮겨 놓겠다는 발언이다. 나는 인본 위에 올라선 자본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본도 인본이 선행되어야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지면을 빌려 극단적 자본 중심주의가 우리 삶에 어떤 폐해를 끼치는지 실사례를 들어 파헤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언급하겠다.
90년대 이전에 태어났다면 석면이라는 물질에 익숙할 것이다. 석면은 뛰어난 내구성, 절연성, 불연성, 흡음성, 경제성 등 여러 유용한 특성 덕에 기적의 물질이라 불릴 만큼 산업 전반에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도 한때는 건축 자재로 자주 활용되었으며, 심지어는 석면을 불판 삼아 고기를 구워 먹는 경우도 흔했다(나도 먹어봤다). 하지만 석면이 인체에 치명적인 1등급 발암 물질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기적의 물질이라 불리던 석면은 단숨에 죽음의 물질이 되었다.
이에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석면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아무리 석면이 유용하고 경제적이라지만, 사람 죽이는 물질을 계속 사용할 순 없을 터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선진국 대다수가 석면 사용을 금지한 데 반해, 미국은 2024년에 들어서 겨우 전면 금지를 할 수 있었다. 왜 미국은 극도로 위험한 1등급 발암 물질을 이제야 금지할 수 있었을까? 그 원인이 단일하다고 볼 순 없지만, 가장 주요하게 작용한 핵심 원인은 자본의 오용이다.
미국에서는 로비가 합법이다. 물론 미국의 로비 제도는 특정 규제 안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문제는 특정 규제 안에서의 작동 여부가 아니라, 정부 정책이 거대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로비는 정책 시행에 있어 민주주의적 논의보다 극소수 자본가의 의견을 더 비중 있게 반영한다. 1등급 발암 물질인 석면 또한, 전면 금지가 이토록 지연된 데에는 석면 업계의 집중적인 로비가 크게 작용했다. 즉, 자본이 인본 위에 선 탓에 이미 오래전에 금지되었어야 했던 물질이 무려 35년간 사용된 것이다.
이제 유튜버의 주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식당에서 친절한 대우를 받고 싶으면, 돈을 많이 벌어 비싼 식당에 가라.' 이를 석면 업계의 로비에 빗대어 다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1등급 발암 물질에서 자유롭고 싶으면, 돈을 많이 벌어 더 큰 액수로 로비해라.' 위 두 명제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두 명제는 인본주의라는 동일한 전제를 갖고, 자본주의라는 동일한 후건을 갖는다. 사뭇 달라 보이는 두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를 공유한다. '자본이 인본보다 중요하다.'
물론 죽음의 물질과 친절 여부의 비교가 너무 비약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끓는 물속의 개구리 이야기처럼, 모든 병폐는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렇게 물의 온도가 오르다가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때는 돌이킬 방법이 없다. 이런 극단적 자본 중심주의 또한 처음부터 사람들 얼굴에 석면을 들이대는 방식으로 시작하진 않았다. 처음엔 개인의 의견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들로 시작해 조금씩 기준을 상향 조정하고, 끝에 가서는 그 기준을 비가역적 단계까지 끌어올린 결과이다. 우리의 안일한 생각이 사회를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에 밀어넣는 것이다.
사실 이런 거대 담론을 다루지 않더라도, 상호 존중이 돈과 상관없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반 식당에 가든, 초호화 호텔 레스토랑에 가든 종업원은 손님을, 그리고 손님은 종업원을 존중하는 것이 옳다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그 사이에 자본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물론 초호화 호텔 레스토랑은 음식을 넘어 경험 또한 판매한다. 그래서 음식 외에도 수준 높은 친절을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가 부가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반 식당 종업원의 불친절에 당위성을 제공하진 않는다. 자동차가 자본에 의해 그 본질인 이동 수단의 기능을 상실한다면 납득이 되겠는가? 상호 존중 또한 인간의 본질 중 하나다. 자본은 '+@'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비스의 질은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결정되어야지, 상호 존중을 '기준'으로 결정되어선 안 된다. 친절은 자본에 좌우되는 변수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상수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게 기본 전제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은 진화 생물학에서 다루는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에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글의 논지를 흐릴 수 있으니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서로를 돕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다시 말해 상호 존중은 진화적으로 인간의 생존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호혜성을 자본에 종속시키는 것은, 과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인류라는 종 자체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인 자기 자신부터 부정하는 게 순서 아닐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도 없다. 다음 질문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여러분의 본능이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받아야 할 모든 존중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당신은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전적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렇듯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본성마저 자본에 종속시킨다면, 이는 곧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성마저 자본에 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본이 태도가 되는 세상에 반대한다. 우리는 마땅히 서로를 대가 없이 존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