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손길이 닿는다는 것

공간에 스며 있는 마음의 밀도

by 이일훈
가레산스이 1.jpg 일본의 전통 정원 양식, 가레산스이(枯山水, かれさんすい)


일본엔 전통적이면서도 매우 독특한 정원 양식이 있다. 물을 일절 쓰지 않고 모래와 돌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양식인데, 이를 '가레산스이(枯山水, かれさんすい)'라고 부른다. 모든 만물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불교의 선종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흔히 '선 양식(Zen Style)'이라고도 한다.


어느 날 나는 다큐멘터리에서 가레산스이를 관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자갈밭을 물결 모양으로 쓸고 지나가는 정원사의 모습은 묵묵히 수행하는 수도승을 연상시켰다.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나는 홀린 듯 정원사의 손길과 그 손길이 만들어내는 물결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정원사의 움직임이 멈추자, 눈앞에는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이 드러나 있었다.


완성된 가레산스이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정갈하다'였다. 그런데 문득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정갈한 것은 무엇일까?' 엄밀히 따지면 가레산스이의 모습이 꼭 정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관된 규칙 속에 불규칙이 존재하고, 그 불규칙들이 모여 다시 어떤 일관된 규칙성을 띠고 있는 듯하다. 자갈들 또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돈되어 있지만,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꽤나 불규칙하고 난잡하다.


그럼에도 정원이 내뿜는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만약 어떤 오브제도 없이 사방이 흰색으로 칠해진 방을 마주한다면, 그때도 '정갈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정갈하다'보다는 '삭막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 것 같다. 순수한 의미만 놓고 보면 흰 방이 가레산스이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방을 보고 정갈하다거나 깔끔하다는 느낌을 잘 받지 않는다.


가레산스이와 비슷한 경우가 또 하나 있다. 호주에서 수학하던 시절, 나는 아르헨티나 출신 할머니의 집에 세를 들어 산 적이 있다. 자신을 '코니'로 소개하던 그 할머니는 빈티지 스타일의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다. 코니는 여러 오브제를 모으는 것도 좋아했는데, 거실과 그녀의 방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일같이 화병을 닦고 카펫을 청소했다. 물건들이 워낙 많아 힘에 부칠 법도 한데, 그녀는 집을 가꿀 때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image.png '코니의 집'과 비슷한 빈티지 인테리어


언뜻 보면 다소 지저분하고 난잡해 보일 수 있는 불규칙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집에 머물렀던 석 달 동안 단 한 번도 나는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집은 늘 정돈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항상 쾌적하다고 느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집은 가레산스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기억 속 코니의 집은 언제나 정돈되고 깔끔한 장소로 남아 있다.


사뭇 달라 보이는 '가레산스이'와 '코니의 집'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둘에는 있고 '흰 방'엔 없는 차이점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나는 그것이 '장소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누군가의 마음'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방문할 때 그 순간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 모습과 연결된 '누군가의 손길'을 함께 본다. 비록 그것이 의식적인 작용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 손길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한다.


우리가 정갈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깨끗함'이 아니라, 그곳을 가꾸는 이가 쏟은 '애정의 밀도'다. 정원사가 자갈 위에 물결을 그리고, 할머니가 낡은 화병의 먼지를 닦아내는 행위는 단순히 청결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그 공간을 스쳐 갈 누군가에게, 또한 그곳에 머무는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환대의 마음이다. 우리는 '흰 방'에선 찾을 수 없었던 누군가의 손길을 좇아 그들이 남긴 마음의 흔적을 읽는다.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 그들의 마음을 느낀다. 우리는 공간을 통해 마음을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연극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