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연극을 하나

우리가 연극을 해야 하는 이유

by 이일훈

P. 연극을 시작한 계기


"직장인 극단에서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취미를 물어볼 때 나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대부분은 내 대답에 눈이 휘둥그레지거나 입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 또한 연극을 시작하기 전까진 이런 취미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 자신이 연극을 하게 될 것이란 상상을 못 했다기보다는, 취미 연극이라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무대를 소수만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내가 연극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 덕분이었다. 연극을 하기 전엔 독서 모임을 운영했었는데, 어느 날 연극이 취미라며 자신을 소개한 분을 만났다. 처음엔 '연극이라는 취미'를 '연극 관람'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것은 단순 관람이 아니라 실제 관객을 동원한 공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취미 연극이라는 개념이 내 사고 범주 밖에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녀가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이라는 단어가 경험 가능한 대상으로 다가오자 묘한 설렘이 몰려왔다. 난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 적이 있는데, 행사 때마다 연극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은 마음 한편 다시는 이루지 못할 즐거운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시는 이루지 못할 즐거운 추억'이 재연 가능한 미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감정은 어린 시절 먹먹한 추억을 떠올렸을 때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취미 연극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어릴 때야 실수해도 관객들이 따뜻하게 웃어넘기지만, 어른이 되어서 관객 앞에 선다는 건 고독한 평가 대상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극이 취미라는 그녀에게 단순 인사치레로 "저도 연극 해보고 싶었는데"라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진부한 인사치레만큼 공허하고 무의미한 한마디였다.


수개월이 지나 그 대화가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 때쯤, 알 수 없는 발신자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안녕하세요. 직장인 극단 입단 안내차 연락드립니다." 이 문자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귀찮다'였다. 시간이 흘러 이때를 곱씹어보면, '귀찮다'가 아니라 '두렵다'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장소를 가보면, 실망만 잔뜩 안고 돌아선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 말이다. 시골 출신인 나에게 있어 기억 속 그곳은 대부분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단번에 거절할 순 없었다. 수개월의 공백에도 날 기억해 주고 추천해 준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집 현관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닿을 장소에 연습실이 있었다. 이는 나와 같은 일명 '집돌이'에겐 엄청난 이점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물리적 거리감의 최소화는 심리적 거리감을 대폭 좁히는 조건이 된다. 결국 나는 신입 단원 OT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번 경험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나오자'라는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연극은, 이제 나의 정체성이자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어느덧 연극을 시작한 지 햇수로 7년이 되었다. 지난 6년 동안 직장인 신분으로 약 스무 편의 극을 올렸으니, 가히 일할 때 빼고는 연극만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신입 단원 강사, 연극 교실 총책임, 단막극제 기획 및 조연출로 활동하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앞으로 계획된 연극 활동도 내 일정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연극을 하면서도 연극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한 건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전까진 이 힘든 과정을 자처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취미를 좋아하면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꺼려졌던 것 같다. 이유를 모르니 인지부조화가 왔던 것이다. 오히려 난 연극 활동을 폄하하기 일쑤였다. 내가 연극을 준비할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은 "대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지?"였다.


이제는 그 이유가 나름 명료해졌다. 그 덕에 연극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하면서 주변에 추천하기도 한다. 이글 또한 독자들이 연극을 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내가 연극을 하는 이유를 통해, 내가 좋아하는 연극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즐겼으면 한다. 그들 또한 나처럼, 연극을 통해 해방감을 느끼고 어디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경험을 만끽하길 바란다.



1. 감정의 출구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누군가는 이성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이성 또한 감정이라는 트리거를 거쳐야 발동된다. 감정이 억압된 채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성이 우리의 본질이라면, 감정 표출의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은 냉정할 정도로 이성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감정적인 상황에서 비이성적으로 대응한다. 감정을 적절하게 표출하는 방법을 모르는 탓에 이성의 트리거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감정 표현을 억제할 것을 교육받는다. 특히 나를 포함한 9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내 청소년 시기를 떠올려보면, 내가 눈물 흘릴 때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남자가 그런 걸로 우냐?"였다. 또한 기쁨을 표현할 때는 "남자가 촐싹대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여자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자의 삶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분명 그들도 여러 방면에서 감정 표현의 기회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마치 감정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질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연극 무대에선 다르다. 우리는 사회적 지위가 오르고 잃을 게 많을수록 감정을 억제할 것을 요구받지만, 무대 위에선 되레 감정을 표출할 것을 요구받는다. 무대 경험이 적은 신입 단원들은 사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기 검열과 감정 통제를 무대 위에서도 똑같이 행한다. 연출이 마음껏 표현해 보라고 다그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신생아 이후 이런 요구를 들었던 적이 없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 무대가 익숙해지고 스스로 옭아매던 쇠사슬을 끊어내기 시작하면, 연기력이 대폭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 또한 이런 경험이 있는데, 이때의 해방감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후련하다. 연기력이 느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순수하게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 자체만으로 체증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연극은 감정 통제 사회에서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탈출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 따르면, 감정은 억압했을 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 한편 응어리가 되어 남는다고 한다. 그 응어리가 쌓이고 쌓여 임계점에 도달할 때,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 문제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감정 통제 사회는 이런 심리적 불건강을 광범위하게 부추기는 듯하다. 마음 풀 곳이 없으니 마음 둘 곳도 없다. 마음 둘 곳이 없으니 마음 살 곳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잊는다.


난 극심한 불안과 불면으로 정신과를 다녔던 적이 있는데, 연극을 하면서 상당 부분 호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연극 덕이었는지 시간 덕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나 자신을 표출했을 때 느꼈던 해방감만은 분명한 감각이고, 그것이 내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만은 확실하다. 이 해방감은 연극 활동 7년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느낀다. 어쩌면 표현에 익숙해지고 그 방법이 다양해지면서 해방감의 메커니즘은 더욱 정교해졌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본 속 인물은 엄밀하게는 나 자신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자 가상의 인물이다. 내 감정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 감정 표출의 해방감을 줄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몸소 깨달은 것은, 감정은 누구의 감정을 표현하느냐보다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매 순간 다가온 감정을 적절한 방식으로 풀어낼 때, 비록 그것이 가상일지라도 실재하는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그 감정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우리 마음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슬픈 영화나 소설을 보고 한껏 눈물 흘리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속이 후련한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작동 방식을 방증한다. 더군다나 내가 그 인물이 되어 실제 살아본다고 상상해 보라. 그 후련함의 밀도는 비교가 불가하다. 엿보는 삶이 아닌 살아보는 삶, 연극이 감정 해방에 있어 매우 뛰어난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연기는 통상적으로 배우가 대본 속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연기는 배우가 대본 속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내면에서 대본 속 인물을 찾는 것이다. 이는 나의 주장이 아니다. 실제 유수의 연기 스승들이 입을 모아 가르치는 내용이고 연극을 하면 할수록 이것이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연기는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감정이 아닌, 내면 탐구를 통해 발견한 내 감정을 표현하는 작업이다. 연기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건, 그것이 흉내가 아닌 내면의 발산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기 몸으로 무대에서 움직인다. 배우는 자기 목소리로 무대에서 말한다. 마찬가지로 배우는 자기 감정으로 무대에서 표현한다. 관객의 상상력은 배우를 극중 인물에 투영하지만, 실제로는 관객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배우 자신의 것이다. 특히 내가 연출할 땐 배우들에게 이 부분을 거듭 강조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여러분 자신의 매력을 발견하고 발산하라. 여러분 자신으로서 무대에 서달라." 무대 위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배우 자신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자기 검열을 하는 이유는 발산한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대 위 감정은 배우에게 어떤 책임도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껏 표현해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그만이다. 세간엔 '책임 없는 쾌락'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억눌린 감정을 책임 없이 풀어내기에 무대만큼 좋은 곳도 없다. 배우는 자신의 모습으로, 그리고 자신의 감정으로 마음껏 무대를 누리면 된다. 배우에게 무대는 가장 안전한 감정의 분출구가 된다.



2. 무아의 카타르시스


나는 명상을 자주 하는데 가끔은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호흡 또는 싱잉볼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나란 존재가 잊히고 호흡과 소리만 남는다. 초보 명상가답게 곧 자의식이 비집고 들어오지만, 나를 잊는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하룻밤 숙면이라도 취한 것 같이 상쾌한 기분이 든다.


얼마 전 신입 단원을 대상으로 팀 빌딩 게임을 진행한 적이 있다. '신뢰의 원'이라는 게임을 했었는데 게임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을 중앙에 두고 다른 사람들은 좁은 원 형태로 그를 둘러싼다. 중앙에 있는 사람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뒤 한 방향으로 쓰러진다. 그러면 원을 형성한 사람들이 부드럽게 그 사람을 밀치며 주고받는데, 중앙에 있는 사람은 절대 몸에 힘을 주어선 안 된다. 원을 형성한 사람들을 믿고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이 게임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연기의 핵심인 반응을 익히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배우는 연기 중 자의식을 줄일수록 상대 배우에 대한 반응력이 상승한다. 자의식이 강하면 자기 모습에만 집중하느라 상대방과 주변 환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신뢰의 원'은 바로 이 지점을 게임으로 승화시킨 훈련이다. 중앙에 선 사람은 자의식을 줄이고 주변 사람의 손길에 모든 걸 맡긴다. 이때 남는 건 주변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뿐이다.


게임의 한 라운드가 끝나자 중앙에 서 있던 단원이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다." 이 말을 듣고 이것이 내가 명상할 때 느꼈던 카타르시스와 유사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내가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에게 집중했을 때 느꼈던 카타르시스 또한 명상과 같은 메커니즘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 배우에게 몰입하려고 했던 나의 노력이 호흡과 소리에 집중하려고 했던 나의 노력과 똑 닮아 있었다.


실제 연기 스승들은 배우에게 자의식을 비우고 상대 배우에게 몰두할 것을 강조한다. 최악의 연기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몰두하는 연기, 즉 자신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지에만 집중하는 연기라고 말한다. 물론 불쑥 끼어드는 자의식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이때는 자의식을 막지 않고 받아들인 후 다시 상대방에게 집중하면 된다. 이 지점 또한 명상과 지극히 닮아있다. 명상 중 자의식이 끼어들면, 이를 거부하지 않고 인정한 후 다시 호흡이나 소리에 집중하여 흘려보낸다.


자아를 잊는 행위를 거창하게 포장하면 우주와 연결된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잊을 때 세상과의 연결이 명료해진다. 이런 철학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그의 스테디셀러 <<몰입>>에서 자아가 사라질 정도의 몰입이 가장 고차원적 행복이라고 한다. 몰입은 그 자체로 만족감을 주고 몰입하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부여한다. 그리고 다시 몰입을 유도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이런 순환 과정에서 만족감은 증폭된다.


물론 언제나 몰입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에서 느닷없이 관객과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기도 한다. 직접 듣기론 40년 경력의 프로 배우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몰입의 빈도 측면에선 확연히 다를 것이다.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늘수록 무대 위 몰입 빈도는 증가한다. 몰입으로 인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빈도 또한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향상된 연기력 덕에 관객의 찬사를 받는 것은 덤이다.


연극은 여러모로 긍정적인 감각을 자극한다. 다른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함께 협동하여 목표를 달성할 때의 만족감 또한 훌륭하다. 그러나 이는 여타 동호회와 마찬가지로 활동 중에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장점이다. 연극이라는 행위 자체가 주는 만족감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일체감, 지난한 과정을 거쳐 창의적인 성과를 냈다는 자기효능감, 머릿속 고민을 잠시 잊고 온전한 나로서 존재할 때의 행복감, 이것이 무대 위 무아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3. 시야의 확장


연극은 큰 비용이 드는 취미는 아니지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협동 예술 특성상, 한번 공연 준비에 들어가면 장막극인 경우 최소 3개월 치 여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뿐만 아니라 동료 배우에게도 민폐이다. 그 3개월의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 과정을 비유하자면 등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등산객이 산을 오르는 과정을 버티는 이유는 정상에서의 성취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은 3개월의 등반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에너지와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내가 연극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한 삶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단 하나뿐이다. 그러나 연극은 배우에게 주어진 삶 외에 다른 삶을 선사한다. 이는 삶의 관람이 아닌 삶의 체험으로써, 소설이나 영화 같은 간접 경험과는 그 밀도를 달리한다.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 어떤 삶을 살든 그로 인한 결과는 배우의 책임이 아니다. 목숨을 걸 만큼 지독한 사랑에 빠져도, 증오에 차 실수로 사람을 죽여도, 배우는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직 그 삶에 대한 경험만이 남는다.


매체 연기(스크린 연기)도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매체는 배우의 예술이 아닌 편집의 예술이다. 나 또한 좋은 기회가 생겨 단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영화는 편집으로 서사를 완성하기 때문에 배우는 인물의 삶을 시간순으로 연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체 배우들은 때때로 자신이 출연한 장면의 서사적 역할을 모른 채 연기하는 경우도 있다. 설사 전체 서사를 파악한다 하더라도, 찰나의 순간을 짜깁기하듯 촬영하는 매체 특성상 서사를 오롯이 느끼기엔 무리가 있다.


뮤지컬 또한 공연 예술이라는 점에서 연극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뮤지컬 관객의 절대다수는 이야기가 아닌 쇼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다. 즉, 뮤지컬에서 서사는 스펙타클한 쇼를 보조하기 위한 수단에 그친다. 연극을 보고 나면 이야기가 기억에 남지만, 뮤지컬을 보고 나면 노래와 춤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뮤지컬의 서사는 화려한 쇼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단순한 플롯을 갖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캣츠>>처럼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가 없는 뮤지컬도 있다.


이런 점에서 한 인물의 삶을 실제 삶의 한 부분처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는 연극 무대밖에 없다. 나는 결코 연극이 가장 훌륭한 연기 매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매체별로 고유한 특징과 장단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삼자의 눈으로 엿보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의 단편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연극 외엔 없다. 그것도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하는 대상과 호흡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연극의 특장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야와 견문을 넓히는 데 여행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여행은 간접 지식을 경험의 장으로 끌어와 시야를 넓혀 주는데, 이는 직접 경험이 간접 경험보다 견문 확장에 있어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게 낫다. 연극 또한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한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경험은 배우로 하여금 시야와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돕는다. 연극은 '시간과 삶'의 여행인 것이다.


누군가는 희곡이 긴 인생 중 아주 짧은 시간만을 다루기에 내 말이 비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극도로 단편적인 삶을 연기하더라도 그 인물의 인생 전체를 구상해야만 제대로 된 연기가 가능하다. 여행지에서 역사가 깃든 장소를 방문할 때, 우리는 그 장소뿐만 아니라 역사의 노선을 함께 경험한다. 배우 또한 한 인물을 연기할 때, 희곡에 담긴 삶뿐만 아니라 삶의 노선을 함께 경험한다.


이렇게 얻은 확장된 시야는 무대 밖에서도 유용하게 작동한다. 요즘은 누군가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해 버리는 일이 잦다. 대표적으로 악플이 그런 예시 중 하나다. 하지만 배우는 타인의 삶 전반을 맥락적으로 이해하려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그 덕에 말로만 하는 공감이 아닌, 실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공감을 바탕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다. 이것이 대인 관계에서 매우 긍정적인 성품이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 무대


무대란 결국,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 또한 크고 작은 무대의 연속일지 모른다. 오늘 하루의 대사와 동선, 그리고 그 안에서 흘려보낸 감정들. 그 모든 것이 모여 인생이라는 연극을 완성한다. "인생은 무대 위 한 편의 연극이다"라고 말한 셰익스피어는 '지금 이 순간'들이 모여 '모든 순간의 예술'이 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러분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예술의 형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많은 사람들이 공연 예술가를 꿈꾼다. 하지만 그 꿈은 이내 시간과 희석된 채 현실 너머로 사라진다. 나는 여러분이 그 꿈을 지금이라도 다시 꾸었으면 한다. 어쩌면 연극을 시작하기 전의 나처럼, 자신에 대한 부족한 확신과 일상적인 관성으로 시작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란 게 정말 별거 없다. 여러분이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면, 영화 보면서 연기를 따라 해본 적이 있다면, 그걸로 자격은 충분하다. 예술은 우리가 세상에 내놓는 결과가 아니다. 예술은 우리를 세상에 내놓는 방식이다.


나는 앞으로도 무대 위에서 연기할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더 나다워지고 세상을 더 따뜻하게 보기 위해서이다. 나는 모두가 한 번쯤은 연극을 해 봤으면 좋겠다. 내가 연극을 통해 느낀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선 무대 위에서 여러분을 만날 수 있다면, 실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정말 그날이 오면 한 마디만 해달라. 덕분에 연극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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