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자 T가 바라본 MBTI

억울한 MBTI를 위한 변론

by 이일훈

프롤로그


MBTI(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는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캐서린 브릭스와 이사벨 마이어스 모녀가 개발한 성격 유형 검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 검사는 여성들의 적성에 맞는 직업 배치라는 실용적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 MBTI는 단순 실용성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언어'로 안착했다. 이제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보다 "MBTI가 뭐예요?"라는 질문이 먼저 나올 정도로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처럼 영향력이 커진 만큼 논란 또한 뜨겁다. 검사 결과의 신뢰성과 과학적 타당성을 두고 의견이 갈리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MBTI 열풍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덕분에 종종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한다. "MBTI가 정말 과학이라고 생각해?", "넌 MBTI를 믿어?" 그럴 때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진다. MBTI 자체는 충분히 과학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비과학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결국 내 답변은 늘 애매한 경계에 머문다. "과학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답변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은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애매함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바로 그 모순의 지점을 짚어보려 한다. MBTI가 과학으로서 지닌 가능성과 사회적 현상으로서 드러내는 한계를 차근히 살피고, 나아가 그 한계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는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MBTI, 과학일까?


우선 내 입장부터 분명히 밝혀야겠다. 누군가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MBTI가 과학인지 아닌지 딱 하나만 정해!"라고 협박한다면, 일단 살고 봐야 하는 처지에서 "과학!"이라고 외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단정 짓기엔 그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양극단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과학'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MBTI를 유사 과학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과학의 범위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정의한다. 그들은 생물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 더 좁게는 오직 물리학만을 '과학'으로 간주하곤 한다. 이는 미디어가 과학을 다룰 때, 주로 물리학적 성취를 중심으로 다루면서 생긴 인식의 결과다. 그 영향으로 대중은 '과학=정확하고 수학적인 것'이라는 조금은 편협한 관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또한 과학이 오직 '명료한 결과'만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착각도 한몫한다. 사실 과학의 본질은 결과 자체보다, 결과에 이르는 사고 과정인 '과학적 방법론'에 있다. 만약 결과만 중요하다면 현대의 대표 유사 과학 중 하나인 '지구 평면설' 또한 과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가 평평하다'라는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과학적 방법론'이 철저히 배제되었기에 그것은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 이렇듯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본질적인 기준은 '결과의 확실성'이 아니라 '과정의 엄밀함'에 있다.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자연을 탐구하면 자연과학, 인간을 탐구하면 인문과학(사회과학), 체계를 탐구하면 형식과학이 된다. 한국 특유의 문·이과 구분 관행과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문·이과 구분은 우리의 인지적 편의를 위한 인위적인 구분일 뿐, 실제 그 경계는 매우 모호할뿐더러 두 영역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심리학, 통계학, 경제학 등도 과학으로 분류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MBTI는 어떨까?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MBTI는 심리학적 가설을 세우고 통계적 표본을 통해 타당성을 검증하는 사회과학적 절차를 밟고 있다. 어떤 이는 그 '불완전함'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조차 발표 당시에는 완벽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수정과 보완의 대상이다. 현대 물리학의 정수인 양자역학 역시 확률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물리학을 과학이라 부르는 이유는 결과가 절대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탐구 과정이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질문이 하나 따라온다. "그럼 혈액형 성격설도 과학인가요?" 답부터 말하자면 '아니요'이다. MBTI는 명확한 심리학적 가설을 설정한 뒤 통계화된 데이터를 토대로 검증을 시도한다. 이는 분명 '과학적 방법론'의 영역이다. 또한 그 결과를 현실에 대입했을 때 인간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혈액형 성격설은 다르다. 탄생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가설을 보완하는 통계적 근거와 심리학적 타당성이 너무도 빈약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혈액형 성격설은 MBTI와 명확히 구분된다.


종합해 보면 MBTI는 엄연히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지만, 그 폭발적인 인기를 발판 삼아 연구가 더 정교해지고 있으며 통계적 데이터도 빠르게 쌓이고 있다. 그러나 인기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바로 그 인기 때문에 MBTI가 과학의 문턱에서 미끄러질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MBTI의 이분법적 구조는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하여 시야를 좁힌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은 인기를 타고 증폭되어 악순환을 형성한다. 지금부터는 그 악순환을 일으키는 MBTI의 구조적 한계와 이분법의 오류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2. 이분법 구조의 한계


나는 INTP다. 아마 내 유형을 듣고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가볍게 넘길 주제를 이토록 진지하게 파고드는 괴짜다움이 INTP의 전형적 특성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MBTI를 알게 된 이들은 십중팔구 "그럴 줄 알았어"라고 반응하며, 심지어 말하기도 전에 먼저 맞히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면 나 역시 'MBTI가 제법 신뢰할 만하네'라고 생각하곤 한다.


나는 현재 직장인 극단에서 6년째 배우로 활동 중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사람 중에는 "근데 너 내향형 아니야?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서?"라고 묻곤 한다. 심지어 때로는 초면에 내 유형만 듣고 '공감 능력이 부족한 냉혈한'으로 단정 짓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면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묘하게 흔들리는 기분마저 든다. T(사고형)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것도, I(내향형)라고 해서 타인과의 교감을 기피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상반된 두 대상을 마주할 때 대립 관계로 인식하는 무의식적 경향이 있다. 남성과 여성, 앞과 뒤, 빛과 어둠 등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상반되어 보이는 대상들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만 다를 뿐, 사실 서로를 보완하는 경우가 많다. 빛은 어둠 없이 성립할 수 없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밝음'만을 실체로 인식하고 '어둠'의 존재는 인식 뒤편으로 보낸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 편향은 MBTI 검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F(감정형)와 T(사고형)를 예로 살펴보자. 사람들은 종종 이 둘을 한쪽이 높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낮아지는 '제로섬(Zero-sum) 관계'로 여긴다. 그러나 이는 이분법적 사고가 빚어낸 착시에 불과하다. 각 성향의 차이는 세상을 해석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의 선호도일 뿐이다. 뇌에 결함이 없는 한, 인간의 거울 뉴런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작동한다. 사실 '공감 능력'이라는 말 자체도 약간의 어폐가 있다. 공감은 능력이 아니라 반사 작용에 가깝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음식 앞에서 침을 흘리는 것을 두고 '침 흘리는 능력'이라 부를 사람은 없다.


얼핏 상반되어 보이는 두 성향은 제로섬 관계가 아닌 '천칭 관계'로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T 성향이 F 성향보다 무거우면, 천칭이 그쪽으로 기울어 표면적으로 T 성향이 더 짙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보면, '천칭 관계'는 '제로섬 관계'와 차이가 없는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두 관계 사이엔 둘을 확연히 구분 짓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


제로섬 관계는 한정된 총량을 두고 점유율을 쟁탈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총합이 100일 때 T가 70이면, F는 반드시 30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칭은 양쪽 접시 위 추의 합이 반드시 100일 필요가 없다. T가 70이라도 F가 69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천칭은 T 쪽으로 기울겠지만, 그렇다고 T가 F의 몫을 갉아먹는 것은 아니다. 단지 T 성향이 조금 더 무거우므로 비교적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이것이 '천칭 관계'와 '제로섬 관계'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천칭은 절대적 무게가 아닌 상대적 무게를 가늠하는 도구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T 성향이 강하다고 해서 F 성향이 약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어떤 T형은 웬만한 F형보다 훨씬 더 강한 F 성향을 보유할 수 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 인물 A (T: 100 / F: 80) → 결과: T형

· 인물 B (T: 40 / F: 60) → 결과: F형

검사 결과 A는 T형, B는 F형으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 F 성향의 절대적 무게는 A(80)가 B(60)보다 크다. 단지 A는 그보다 더 무거운 T(100)를 가졌기 때문에 천칭이 T 쪽으로 기울었을 뿐이다.


우리는 천칭의 기울기에만 매몰되어 추의 무게를 간과한다. 그 기울기만 보고 비교적 약한 성향의 절댓값마저 낮을 것으로 오해한다. 누군가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천칭의 기울기만큼이나 추의 무게가 중요하지만, 대중은 오로지 기울기만으로 대상을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상대방을 이분법의 틀 안에 가두어 단순화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너는 P라서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구나.", "넌 감정적인 거 보니 F인가 봐." 이런 말들은 모두 추의 무게를 보지 않는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실제 MBTI 검사 결과는 퍼센티지로 나오는데요?"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각 설문 항목을 합산해 백분율로 환산한 것이지, 실제 세상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는 아니다. 식당에서 식사 중인 손님의 성비를 백분율로 계산한다고 해서, 그 수치가 식당에 방문하는 모든 손님의 성비를 대표하는 건 아니다. MBTI도 마찬가지다. 퍼센티지는 ‘그 순간의 상대적 기울기’일 뿐, 각 성향의 절대적 무게까지 반영하진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이를 ‘천칭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럼 두 성향의 총량이 유독 낮은 사람도 있겠네요?" 이 또한 맞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우생학적 발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천칭 관계'가 제로섬 관계와 다르게 총량에 제한이 없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각 성향을 강화하거나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검사 결과가 바뀐 사람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환경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이는 성격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방증한다. 이분법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성장의 문 또한 열리는 셈이다.



3. MBTI의 면죄부식 활용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우스꽝스러운 글을 보았다. 자신의 MBTI 검사 결과(ESFP)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일부러 INTP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INTP도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유형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나름 이상적인 모습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피식 웃으며 넘길 이야기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역시 비슷한 오류를 저지른다.


우리는 자신의 실제 모습과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종종 혼동한다. 실재 자신이 아닌 동경하는 성향을 현재의 내 모습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배려심 많다고 소개하면서 정작 그 '배려하는 나'에 빠진 이기적인 사람. 자신은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무당을 찾는 사람. 이는 자기 보고식 설문이 갖는 공통된 결함으로, MBTI 검사 과정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물론 MBTI를 잘못 아는 것이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그리고 앞서 말한 '천칭 관계'를 생각하면, 이를 이상적인 자아를 향한 성장의 의지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현재 위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는 능력인 '메타인지'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실재적 자신과 이상적 자신을 뒤섞는 이들 대부분이 메타인지 측면에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두 모습을 혼동하는 것 자체가 부족한 자기 객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메타인지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능력이다. 메타인지가 부족하면 '나'라는 인식이 희미해지기 쉽다. 이때 인간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자신을 외부 요소의 틀에 가두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마치 낯선 곳에 떨어진 여행자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눈앞의 군중만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맹신자들이다. 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한 탓에, 자신의 신념이 공격당하면 마치 직접 공격이라도 당한 듯 반응한다.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할 '내면의 지도'가 없기에, 정체성을 외부 요소에 통째로 의탁하는 것이다.


MBTI가 소비되는 과정에서도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MBTI를 성향을 설명하는 도구를 넘어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한다. 이들에게 MBTI는 고정불변의 자기 정체성이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MBTI를 근거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나는 I라서 원래 대인관계가 안 좋아.", "나는 P니까 일정 세우는 건 네가 해.", "나는 N이라 실용적인 일에는 관심 없어." 마치 MBTI가 만능 면죄부라도 되는 듯, 자신의 결점을 덮고 타인이 손해를 감수해야 할 이유로 악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MBTI는 우리 성격의 '현재 좌표'를 보여줄 뿐, 우리가 도달할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신경 가소성으로 인해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의지에 따라 성격 또한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천칭 관계'에서는 각 성향의 총량이 제한적이지 않다. 그래서 성격 변화는 F에서 T로 급격히 뒤집히는 극단적 변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성향을 유지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부족한 성향을 학습하고 보완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MBTI는 자신을 고정하는 '틀'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에필로그


지금까지 MBTI의 과학적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활용 방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결국 MBTI의 가치는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단순한 재미로 소비하는 현상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진화생물학이나 양자역학마저도 단순 재미로 소비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론이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도태되기 마련이며, 즐거운 소비는 학문이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협소하게만' 소비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작은 상자에 갇혀 더 이상 높이 뛰지 못하는 메뚜기처럼, 세상 모든 것은 우리가 소비하는 방식에 따라 한계가 결정된다. 사실 이분법적 판단과 면죄부식 합리화는 MBTI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문제다. MBTI는 우리 성향을 해석하는 도구일 뿐, 도구의 오용으로 인한 폐해는 전부 우리 인간이 저지른다. 누군가가 칼로 사람을 해친다고 해서 칼이라는 도구를 비난할 순 없는 법이다.


MBTI는 단순 성향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지하고 보완하기 위한 '성장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단점을 옹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이정표로 삼을 때, MBTI는 비로소 건강한 유희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MBTI 역시 과거의 혈액형 성격설처럼, 대중에게 배척당하고 기피되는 낡은 유산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는 MBTI가 지금보다 발전하여 세상을 더욱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서로의 차이를 더 좁힐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대문자 T'가 생각하는 MBTI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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