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는 왜 항상 늦을까?

'프로 지각러' 작심 비판

by 이일훈

프롤로그


'코리안 타임'이라는 해묵은 용어가 있다. 10분 정도의 지각은 인간미로 치부하는 한국인의 관용을 꼬집는 표현이다.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듣기 어렵지만, 우리가 예전보다 시간 약속에 엄격해졌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조 섞인 농담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지각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각은 이제 일상의 중력처럼, 피할 수 없는 비루한 관습이 되었다.


나는 시간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약속의 성격이나 경중을 떠나 최소 30분 전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한다.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라며 반문할지 모르나,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는 의지는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노력'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나 역시 때때로 늦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나 찰나의 안일함에 빠져 정해진 시간을 넘을 때가 있다. 비록 그 빈도는 매우 낮지만, 그때마다 시간을 어긴 자신을 뼈아프게 돌아본다.


반면 지각이 삶의 기본값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지각할 때마다 사과하지만, 그 사과할 일을 몇 시간 후에 다시 또 저지른다. 가히 '지각'과 '사과'의 뫼비우스의 띠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지각이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라도 되는 양, 기차 시간에 늦어 놓고 왜 정시에 출발하냐며 민원을 넣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그들의 태도가 충격이겠지만, 그들에겐 기차가 제시간에 떠나는 일이 더욱 충격인 듯하다.


MBTI가 유행을 넘어 일상이 된 요즘, 끝자리가 'P(인식형)'인 사람이 지각을 자주 할 것이란 편견이 팽배하다. 그 반대인 'J(판단형)'에 비해 계획성이 부족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MBTI의 각 유형은 표면적 도구일 뿐,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본질을 규정한다. 누군가는 망치로 집을 짓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타인을 공격하는 데 사용한다. 따라서 소위 '프로 지각러'의 문제점은 성격 유형보다 근본적인 위치에서 출발한다. 이들의 상습 지각은 인식이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의 문제다.


'프로 지각러'는 어떤 렌즈를 착용하든 세상을 자기 방향으로 굴절시킨다. 기차가 자신의 일정에 맞춰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삐뚤어진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지각이 잦은 독자라면 지금까지의 주장이 꽤 불쾌할 것이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라며 선을 긋고 싶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감이다.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지각의 근원이 자기중심성이라는 사실은 변하진 않는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라는 합리화마저 본질이 자기중심성에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 글에서는 '자기중심성'과 '지각'의 연결고리를 두 축으로 탐구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폐해를 논하고자 한다. 추측건대, 지각이 잦은 독자 대부분은 이쯤에서 '뒤로 가기'를 눌렀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특유의 '성찰과 개선에 대한 무관심'이 작동했을 테니까. 이렇듯 '자기중심'의 진정한 반대말은 '타인중심'이 아니라 '자기성찰'이다. 나만 중요한 사람에게 성찰을 기대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따라서 이 글은 '프로 지각러'에게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늘 손해를 감수해야 했던 '시간 엄수자'들의 막힌 속을 뚫어주는 것이 목적이다.



1. 계획형 프로 지각러: 오만한 설계자


주변을 둘러보면 겉보기엔 누구보다 계획적이지만, 지각만큼은 밥 먹듯이 하는 부류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계획형 프로 지각러'이다. 어감상 지각을 계획적으로 하는 사람들 같지만, 사실은 잘못된 계획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세상이 자기 뜻대로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변수'란 안드로메다 저편의 일이다. 이들의 머릿속 계획은 절대적이며, 외부의 어떤 영향에도 굴하지 않는 인류의 보편 원칙이다. 자신을 세상이라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객체가 아니라, 그 밖에서 세상을 재구성하는 설계자로 착각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변수의 존재'만큼 확실한 상수도 없다. 이들의 계획은 고작 1kg 남짓한 두개골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 계획이 머리에서 벗어나 현실과 조우하는 순간,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이런 틀어짐의 첫 단추는 이후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이들은 변수의 첫 타격을 맞고도, 세상이 자기 초안대로 흘러갈 것이란 비현실적 낙관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시작부터 대차게 휘청거렸지만, 계획의 전면 수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실로 '오만함의 불도저'가 아닐 수 없다.


안타깝게도 이들 역시 무한한 변수의 바다를 부유하는 객체에 불과하다. 파도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부유물 말이다. 이들은 이 사실을 망각한 채, 늘 외부 요인을 변명으로 늘어놓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하철이 바로 앞에서 출발했어요", "오늘따라 엘베가 층마다 멈추더라고요", "퇴근 시간 강남대로가 이렇게 막힐 줄 몰랐어요" 등등 이들의 변명을 한데 모으면 인류 역사상 가장 두꺼운 '비극 선집'이 완성될 것이다. 오직 이들에게만 온갖 불운이 닥치는 것을 보면, 온 세상이 조직적으로 이들을 괴롭히는 것이 분명하다.


'계획형 프로 지각러'는 반복되는 패턴에서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한다. 패턴은 계획과 동떨어진 외부 변수이므로 애초부터 배울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매번 이동에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면, 다음에도 그만큼 걸릴 것으로 예측하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하지만 이들의 비대한 자아 앞에서 현실의 패턴은 잡음에 불과하다.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외부의 질서는 아무리 명료해도 의미를 상실한다. 가히 코페르니쿠스조차 설득을 포기할 '천동설형 인간'이라 할 만하다.


이들의 이동 시간 계산법을 보면, 이들 주변의 시간이 왜곡된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들은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이동 시간만을 계산한다. 실로 스마트폰을 가장 스마트하지 않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때때로 집 현관문이 지하철 스크린도어와 일체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축지법이라도 익혔는지 지하철에서 내려 목적지까지의 이동 시간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다 늦으면 또 만만한 지하철을 물고 늘어진다. 이쯤 되면 서울교통공사 임직원들은 그 월급 받고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난 천재지변이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까지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나 역시 늦을 때가 있고, 지각한 모든 사람을 나무라는 행패를 부리지 않는다. 불가항력은 말 그대로 '통제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며,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은 반드시 발생한다. 하지만 이런 '거대 변수'들은 드물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예외까지 대비하며 살 수 없다. 그런 강박적인 삶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자가 면역적 삶일 것이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은 '어쩔 수 없이' 늦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상의 변수들을 전부 통제하려 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10분만 서둘러도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알량한 계획에 짜 맞추느라 거스르는 사람들 말이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지하철을 놓친다면, 그 시간대의 지하철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늘 다니던 거리임에도 자주 늦는다면, 당신의 일정은 처음부터 잘못 설계된 것이다. 당신은 기존 일정을 전체적으로 앞당겨야 한다. 이 경우 '일찍' 나선다는 사고방식부터 뒤집어야 한다. '일찍'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시간이, '정시'이기 때문이다.



2. 방임형 프로 지각러: 회피의 연금술사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계획형'이 있는 반면, 책임 의식 부재와 자기 관리 부족이 주특기인 '방임형'도 있다. '방임형 프로 지각러'에게 책임과 배려를 기대하는 건 화성에서 물줄기를 찾는 것만큼 어렵다. 그런데 이들은 갈등을 직시할 책임감마저 없어서 사과는 곧잘 한다. 핑계부터 내던지고 보는 옆 동네 사촌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사과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나 늦은 거 아니까 지적하지 마세요'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들에게 사과는 책임의 표현이라기보단 회피의 기술이다. 그래서 들숨에 지각을 하고 날숨에 사과를 한다. 지각과 사과가 자동화된 일상 속에서 죄책감마저 희미해진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등장과 동시에 영혼 없는 '죄송합니다'를 오토매틱으로 발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사과에서 느끼는 불쾌감의 정체가 바로 이런 '진정성의 결여'이다. 그렇다고 사과를 '배출'한 사람에게 따져 묻기도 난감하다. 괜히 따졌다가는 결국 기다린 사람만 옹졸해지는 연금술이 펼쳐진다.


책임 의식 부재와 자기 관리 부족도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성에 기인한다. 언뜻 타인과 무관해 보이지만, 책임과 자기 관리라는 덕목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맺어진 암묵적 합의이다. 우리가 두 덕목이 결여된 사람을 꺼리는 이유는, 이들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암묵적 합의를 교묘히 위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반이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건 자명하다. 이런 이유로 이들과 대화할 때 느끼는 묘한 불쾌감은 지극히 타당한 감정이다. 금이 간 유리잔에서 물이 새듯, 이들의 무책임 또한 삶의 모든 순간에 새어 나오기 때문이다.


때때로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폭력적인 악취를 풍기는 사람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들 중 다수가 책임과 시간 개념 또한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는 책임 의식 부재·자기 관리 부족·시간 개념 결여라는 세 가지 표면적 특징이, 결국 '자기중심성'이라는 하나의 뼈대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성 탓에 이들은 남에게 끼친 폐해를 알지 못하며, 알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들에게 사회적 호혜란 개인적 특혜를 위한 밑거름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을 합리화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책임감이 투철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이들은 '이게 바로 나인데 어떡해', '이 정도는 사람들이 이해해 줘야지',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래'라며 세상이 일방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쩌다 한 번 약속을 지키면, 온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유난을 떤다. 그 업적이 너무도 위대해서 광화문 광장에 기념비라도 세워줘야 할 판이다. 도대체 정부는 내가 낸 세금으로 기념비 안 세우고 뭘 하는지 모르겠다.


방임에는 늘 자매품처럼 따라다니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선약 개념의 부재이다. 이들이 약속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시간이 양방향으로 흐르는 듯한 환각에 빠질 지경이다. 이들은 이미 잡힌 약속 위에 새로운 약속을 태연히 쌓아 올리고, 이전 약속은 당연한 수순처럼 밀어낸다. 약속은 상호 신뢰의 증표이지, 더 좋은 대안이 없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 아니다. 상대방은 자신이 보험이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약속 장소로 나갈 준비를 착실히 한다. 차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적인 광경이다.


물론 선약을 취소해야 할 중대사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약속을 갈아 끼우는 기준은 '사안의 중대성'이 아니라 '개인의 선호도'이다. 갑작스러운 데이트, 느닷없는 맛집 예약, 매일 있는 게임 이벤트 등 지극히 사적인 욕망을 위해 약속을 파기한다(물론 진짜 이유는 숨긴 채, 멀쩡히 살아있는 주변인을 부고 명단에 올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북극 펭귄만큼도 없다. 선약을 위해 기회비용을 지불한 상대방은 결국 대양 한복판에 던져진 조난자처럼 방황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계획형 프로 지각러'는 공동체의 합의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 한다는 점에서, '방임형 프로 지각러'는 공동체의 합의를 태연히 묵살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이다. 두 성향 중 한 극단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모임의 성격, 만나는 상대, 자기 기분에 따라 두 성향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회사에 출근할 때는 계획형이지만, 친구와 만날 때는 방임형이 되는 식이다. 결국 본질은 '자기중심성'이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발현인 것이다.



3. 시간 강탈: 비가역적 자산의 횡령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런 비물질적인 대상을 은연중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시간만큼 희소한 자원이 없음에도, 마치 영원이라는 무한한 잔고를 가진 것처럼 살아간다. 물론 모든 시간을 생산성과 의미로 채울 필요는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용한 시간'조차 뇌과학과 정신분석학적으로 그 유용성이 입증되었다. 이렇듯 시간이라는 자원은 개인에게 무궁무진한 가치를 제공한다.


하지만 타인의 시간을 멋대로 횡령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시간은 비록 비가시적이라 할지라도 엄연한 개인의 사유재산이다. 우리는 시간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흐르는 절대적 상수로 여기지만, 아인슈타인이 증명했듯 시간은 상대적이다. 이는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에서도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를 볼 때,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떠올려 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우리는 고정불변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고립된 고유의 시간선을 살아간다. 이것은 결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 우리는 각자만의 시간을 사용하고 경험하는 각기 다른 시간선의 주인이다. 따라서 약속 시간을 어기는 행위는 타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범죄와 다름없다. 심지어 시간은 물질과 달리 복구가 불가능한 비가역적 자산이다. 한 번 뺏긴 돈을 복구할 수 있지만, 한 번 뺏긴 시간은 차원 너머로 영영 사라진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의 완전한 상실'이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보겠다. 만약 열 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한 명이 10분 늦는다면, 낭비된 시간은 총 몇 분일까? 이미 눈치챘겠지만 답은 '90분'이다. 그런데 이 계산법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왜인지 낭비된 시간은 단 10분인 것만 같다. 이는 무심결에 우리가 절대적인 시간선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엄수자'마저 이 함정에 빠져 '프로 지각러'가 빼앗은 시간을 과소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사라진 시간은 90분이다. 아홉 명이 10분 동안 각자 무언가를 기록한다면, 10분이 아닌 90분 분량의 결과물이 나올 것은 자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 지각러'들은 사회적 손실을 양산하는 주범이다. 자신은 '고작 10분'이라며 합리화하겠지만, 실제 발생한 손실은 '고작 10분' 따위가 아니다. 더군다나 본인은 그 10분을 잠이나 화장 등으로 알차게 소비했다. 한 사람의 '10분'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90분'이 무의미하게 증발해 버린 것이다. 실로 최악의 등가 교환율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간의 기회비용을 허무하게 상실한 사람들은 제시간에 도착한 사람들뿐이다. 이렇듯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가는 사람들이 '프로 지각러'들이다.


재산을 강탈하는 행위에서 존중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럴 리 만무하다. 시간을 강탈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프로 지각러'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물론 실수는 언제나 발생하며 누구나 늦을 수 있다. 인류와 실수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타인을 존중한다면, 자신의 과오 앞에서 진심으로 고개 숙이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프로 지각러'들에게 결여된 것이 바로 이 '존중의 태도'이다. 이들이 존중하는 법을 깨닫기엔, 그 세계가 너무도 비대하고 자기중심적이다.



에필로그


누군가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는 넓히는 것이 아니라 좁히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문제의 99%는 대인 관계에서 온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소위 '진국'들과 시간을 보내기에도 우리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관계의 지속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몇 가지 세워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간을 대하는 태도'이다. 지각은 단순 시간 관리의 실패가 아니다. 이는 자기중심주의라는 본질적 결함의 발현이다.


나는 '지각' 자체를 단죄할 생각은 없다. 단지 '시간'을 주제로 '인격'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자기 말만 내뱉고,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들며, 타인을 도구 취급하는 이들이 시간 개념이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위생 관념이 없고, 책임감이 부족하며, 배려를 모르는 이들이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것 또한 필연이다. 이 모든 악덕은 자기중심성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나뭇가지들이다. 이렇듯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한 사람의 인격과 삶 전반을 엿볼 수 있는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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