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를 읽고

반쪽짜리 낙관주의의 맹점

by 이일훈

들어가며


약 6년 전, 처음 <<팩트풀니스>>가 출간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지적 열풍이 일었다. 여러 독서 모임의 지정 도서로 선정되어 활발한 논의가 이어졌고, 독서인들 사이에서는 빠르게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2024년 기준으로 누적 50만 부 판매를 기념한 특별판이 출간될 정도였으니, 단순한 베스트셀러를 넘어 이례적인 성공을 거둔 '메가 베스트셀러'라고 부를 만하다.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거의 한 번쯤을 접했을 법한 인기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이 책을 펼친 사람을 종종 마주칠 수 있다.


2025년의 끝자락에 와서 2019년의 책을 비평하는 일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최근 지인의 추천으로 다시 읽게 되면서,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아리송함을 다시금 떠올렸다. 덕분에 그때 미진하게 남았던 의문을 되짚고, 다시 사유해 볼 시간을 가졌다. 이 비평은 <<팩트풀니스>>가 내세우는 낙관주의의 뿌리가 본질적으로 편협한 시선에 있음을 지적하며, 한쪽 눈을 감은 채 세상을 바라보는 '반쪽짜리 시야'의 한계를 짚고자 한다.



1. 고전적 승리에 취한 낙관론의 한계


<<팩트풀니스>>의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인류는 극빈층 감소, 평균 수명 연장, 아동 사망률 개선과 같은 지표에서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고, 그러한 통계적 사실을 근거로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저자 로슬링이 인용한 자료는 거짓이 아니다. 그의 논리 또한 정연하고, 방대한 데이터는 현실의 진보를 입증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야의 한계에 있다. 로슬링은 산업화 시대에 인류가 마주한 '고전적 사회 문제'에만 집중한다. 기술 발전과 인구 증가로 인한 '새로운 위협'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외면한다. 물론 극빈층 감소나 수명 연장, 그리고 아동 사망률 개선이라는 진보의 지표들은 분명 가치 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의 문제들이 개선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날의 세상이 전반적으로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섣부른 비약이다. 세상은 몇 가지 수치만으로 단정할 수 있는 단순한 체계가 아니다.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로슬링은 자신이 강조하는 데이터 뒤편에서 '선택 편향'의 오류를 범한다. 이는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하려는 전형적인 목적론적 사고방식의 문제다. 그는 이미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라는 낙관론적 결론을 세워둔 후, 이 명제를 뒷받침할 증거만을 선별하여 제시한다. 통계의 적극적인 사용은 오히려 독자의 시야를 제한하기도 한다. 숫자와 그래프는 설득력을 주지만, 동시에 비판적 시선을 무디게 만들기도 한다. 한 마디로 '통계의 함정'이다. 그러나 세상은 통계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수치 너머의 영역에서 진동한다.



2. 새로운 위협: 현대적 사회 문제


산업화 이후, 그전에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새롭게 표면으로 떠올랐다. 기후 위기, 정보 오염, 양극화의 심화, 디지털 중독 등이 대표적이다. <<팩트풀니스>>는 산업화 시대의 '고전적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새롭게 부상한 '현대적 사회 문제' 앞에서는 침묵한다. 이 때문에 로슬링이 제시한 '세상을 오해하게 만드는 10가지 직관 본능'의 설득력이 약화된다. 그는 간극 본능이나 부정 본능 같은 심리학적 인지 오류를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은 새로운 위협을 외면한 채 과거의 문제에만 매달리는 편향에 갇혀 있다.


주목할 점은, 이 '현대적 사회 문제'들이 로슬링이 제시한 '고전적 사회 문제'들과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인류가 빈곤을 줄인 사이, 기후 위기는 이미 특이점을 넘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그리고 정보는 넘쳐나지만 그 속에서 진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가짜 뉴스와 탈진실이 '음지'를 넘어 '양지'마저 잠식하고 있다. 양극화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N포 세대를 양산했고, 디지털 중독은 우울증과 ADHD 환자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한낱 우려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악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나열하기조차 버거운 새로운 위협들이 오늘의 일상 곳곳을 잠식하고 있다. 항생제 내성, AI의 윤리적 딜레마, 갈등의 경제적 비용, 고령화 등, 모두가 예외 없이 현 시대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고전적 사회 문제'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더라도, 그로 인해 세상이 전반적으로 좋아졌다는 결론은 비약이다. 낙관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위협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안온한 확신에 안주하도록 부추긴다. 로슬링은 최소한 자신의 논의가 산업화 시대의 의제에 한정된 것임을 밝혔어야 했다.



3. 훌륭한 반쪽짜리


로슬링의 공적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지나친 비관론에 빠진 사람에게 <<팩트풀니스>>는 사유의 균형을 되찾게 해주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 또한 존재한다.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훌륭한 반쪽짜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반쪽이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 한쪽 눈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다른 눈이 흐릿하면 세상은 왜곡되어 보인다. 이 책의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이다.


왜곡된 시야로는 현실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 따라서 로슬링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여과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논지가 전적으로 틀리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오해하게 만드는 10가지 직관 본능' 역시, 편향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인지적 렌즈로 기능한다. 다만 '세상이 일방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라는 낙관론만큼은 체리피킹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은 세상이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세상이 진보하거나 퇴보한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세계의 구조가 너무도 거대하고 복잡하다. 나는 '세상의 존재 자체'만을 긍정한다. 진보나 퇴보로 재단할 수 없는, 역동하는 세계의 현존을 아는 것이 내 인지의 한계이다. 그래도 나는 세상이 점점 나아지리라고 믿는다. 이것은 주장이라기보다는 '희망을 담은 선언'이다. 맹목적인 낙관론 대신, 이러한 희망적인 긍정론이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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