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오용에서 '틀림'의 윤리까지
문제의식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서로의 생각이나 외모, 능력 등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의미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단순한 차이에서 비롯된 의견에까지 어떻게든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려는 모습은 일상에서 자주 목격된다. 어쩌면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무의식에 내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잣대가 얼마나 편협한지 인식하지 못한 탓에, 그런 접근이 어떤 문제를 품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틀리다'와 '다르다'를 혼용하는 경우도 있다. 일례로 '의사와 수의사는 틀리다'처럼,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식이다. 처음엔 이런 혼용이 고등 교육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세대에서 주로 발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둘을 뒤섞어 쓰는 모습은 자주 관찰되었다. 언어 오용은 교육 수준, 세대, 사회적 지위와는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처음엔 이와 같은 혼용이 단순 수사적 혼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구분 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일관된 방향성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강한 이분법적 성향을 언어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두 표현을 혼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것'을 실제로 '틀린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았다. 의도와 무관하게 세상을 아군 아니면 적군, 칭찬 아니면 모욕, 찬성 아니면 반대로 구획 짓는 것이다. 그들은 대상을 주관적 기준으로 쪼갠 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스펙트럼과 공존 가능한 지점마저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나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표어가 널리 퍼진 데 있어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이다. 이 표어의 보편화 덕분에 '틀렸다'라고 말하기 전 한 번 더 고민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듯, 이 표어 또한 언어의 오용을 낳는다. 요즘은 이 표어의 파급력에 짓눌려, 명백히 '틀린 것'조차 '다른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틀리다'와 '다르다'의 혼용이 품은 근본적 문제, 즉 이분법적 성향 투영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틀리다'라는 표현에 과도한 윤리적 부정성이 부여되면서, 결국 또 다른 이분법의 희생양이 탄생했다. 한 방향으로 접힌 종이를 편답시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접는다면, 결국 다른 방향으로 접힌 종이가 될 뿐이다. 이번 글에서는 '틀림'과 '다름'을 동시에 왜곡하는 이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문제를 초래하는지 짚어보고자 한다. 말미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해결의 방향 또한 제시하고자 한다.
1. 언어의 윤리성
언어는 거울이다. 너무 투명해서 화자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동시에 언어는 껍질이다. 너무 피상적이어서 화자의 진짜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는 이처럼 모순적이지만, 바로 이 역설이 언어의 본질에 가깝다. 언어가 내포하는 모순은 인간의 모순을 그대로 투영한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 범주 안에서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는 모순투성이인 인간의 모습을 빼닮았다. 가히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우리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피조물인 언어에 종속되곤 한다. 언어를 의식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의 항상 언어에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 순간 자신의 언어를 의식적으로 성찰하려는 노력은 엄청난 정신적·신체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우리에게는 이를 감당할 만한 에너지가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 에너지를 전부 언어 성찰에만 쏟아붓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부모도 결국 자기 삶이 있으니까. 그래서 언어는 인간 사고의 투영물이면서, 마침내 인간 사고를 굴복시키는 지배물이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피조물의 역습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표현의 탄생 배경과 의도 자체는 매우 선하다. 이 덕분에 생각이나 외모의 차이를 좁히려는 시도가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 표현의 보편화 이후 한참이 지난 지금, 이제는 배경과 의도가 증발한 채 껍질만 남아 또 다른 이분법을 낳고 있다. '다름'이라는 단어에 과도한 윤리성과 긍정성을 부여한 나머지, 이제는 역으로 '틀림'이라는 표현 자체를 부정하려는 모습도 쉽게 목격된다. 방향만 바뀌었을 뿐, 또 하나의 이분법적 함정이다.
이러한 전도 현상은 명백히 틀린 상황에서도 '틀렸다'라는 말을 꺼리게 만든다. 우리는 대외적으로 좋은 사람이길 바라고, 이런 무의식적 바람이 스스로 언어를 검열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가 '틀렸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불필요한 수식어구를 잔뜩 늘어놓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수식어구는 윤리적 완충장치가 되어 '틀렸다'라는 표현이 가지는 부정성을 희석한다. 반면 '다르다'라고 말할 때는 이런 잡다한 수식어가 붙는 경우가 훨씬 드물다. 우리는 '틀림'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 이상할 정도로 주변 눈치를 살핀다.
이는 우리가 언어를 인간의 틀 밖에 둔 채, 마치 독자적인 지위를 가진 존재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의 틀 바깥에서 사용될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모든 언어에는 반드시 인간이 개입한다. 인간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 천상의 언어나, 이데아 어딘가에 존재하는 언어의 보편자 같은 것은 없다. 혹시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언어를 탐구할 수 없으며, 알고자 시도하는 순간 다시 인간의 개입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독립성을 논하는 일은, 눈 감고 키보드의 아무 곳이나 눌러 나온 문자처럼 공허하다. 그래서 언어는 독립된 객체가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하는 공생체다.
그럼에도 우리는 특정 언어 표현에 과도한 지위, 이를테면 윤리성 같은 것을 부여한다. 심지어 자신이 부여한 그 지위에 스스로 종속되기도 한다. 자식에게 몸소 왕관을 씌워준 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변을 위탁하는 꼴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틀렸다'라는 표현 자체를 두려워한다. 정작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지 못했던 사람들만큼이나 이분법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과, 우리 마음속 감시자의 눈치를 살피느라 말이다. 그러나 '틀렸다'라는 말 대신 '다르다'라는 말을 선택한다고 해서 우리의 윤리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긍정성을 암시하는 언어 표현이 화자의 윤리성을 증명해 주지 않는다. 언어는 껍질이다.
2. 언어의 두 얼굴
실제로 우리의 윤리성을 드러내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언어는 피상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기 쉽고, 그 자체로 화자의 진짜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어를 거울이라고 한 말은 틀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언어는 껍질인 동시에 거울이다.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언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두 가지 큰 틀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하나는 '언어의 표면적 사용'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맥락적 사용'이다.
먼저 '언어의 표면적 사용'은 발화된 말만으로 화자의 실체를 알 수 없는 경우를 뜻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는 평화주의자야"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이 말은 그가 실제 평화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평화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단지 아직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아마도 '보류'일 것이다.
반면 '언어의 맥락적 사용'은 화자의 언어가 실재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방식'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이는 행동의 영역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누군가가 "나는 평화주의자야"라는 선언을 하지 않더라도, 극심한 갈등 상황에서 꾸준히 중재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런 모습이 반복적으로 관찰된다면, 우리는 맥락상 그가 평화주의자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의 맥락적 사용'은 '언어'보다는 '행동'에 더 가까운 영역이다. 말은 그 자체로 행위를 포함하는 법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도처에 흩어진 말들의 맥락을 전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접근은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이 점이 우리가 언어의 피상성에 쉽게 현혹되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본능이, "나는 평화주의자야"라는 말을 추가 검증 없이 곧이곧대로 믿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언어의 표면적 사용'은 강력한 영향력을 획득한다. 다수의 믿음이라는 물량 공세는 그 믿음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압도할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힘에 눌려 평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언어 사용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 겹겹이 둘러붙은 완충제를 하나씩 떼어내고 나서야, "그건 아니야. 틀렸어."라는 짧은 속내를 가까스로 드러낼 수 있다.
정리하자면, '틀림'이 '다름'으로 왜곡되고 변질되는 현상은 우리가 '다름'이라는 표현에 과도한 윤리적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은 무시한 채, 특정 표현이 띠고 있는 흐릿한 윤리성을 이용해 자신의 윤리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윤리성은 허상에 불과하다. 언어라는 껍데기에 윤리적 지위를 덧씌운 뒤, 그것을 입 밖에 내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윤리가 완성되었다고 착각하는 셈이다. 이는 한마디로 '대리 만족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먹방 시청으로 얻는 대리 만족이 실제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하듯이, 말 몇 마디로 얻는 대리 만족 또한 실제 윤리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3. 오용의 대가
요즘 분위기를 보면, 조만간 '1+1=3'조차 틀린 의견이 아니라 다른 의견으로 존중받을 기세다. 그러나 틀린 의견과 다른 의견은 분명히 구분된다. 다른 의견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채 논의 테이블에 오를 수 있지만, 틀린 의견은 애초 그 테이블에 올라갈 자격이 없다. 틀린 의견이 다른 의견과 같은 지위로 격상된다면, 철학자 프랭크퍼트가 말한 '개소리(Bullshit)'가 진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꼴이다. 진실은 도출되는 과정에서 학술적 검증, 실험, 사회적 합의, 시간, 자본 등 엄청난 규모의 리소스를 소모한다. 그런데 '개소리'가 진실과 동일한 층위로 올라서면, 진실 검증에 투입되어야 했을 리소스가 그 '개소리'를 반증하는 데 낭비된다. 실제로 지구 평면설 반박을 위한 각종 실험을 보면, 인류의 과학 기술이 어느 순간 수백 년은 퇴보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 틀린 것들을 다른 것들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그것이 명백히 틀렸음을 확신하면서도, 언어의 표면적 윤리성에 짓눌린 탓에 선뜻 확언하지 못한다. 단순히 '아니면 말고'라든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넘길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언어의 표면적 사용'은 우리의 본능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가진다. 이 파급력이 워낙 견고하기 때문에, 한 번 뒤틀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처음보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사회적 비용이 필요하다.
사회적 비용이라고 하니 실감이 잘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집단에서 발생하는 비용도 사회적 비용의 한 종류이다. 취미 동호회, 소규모 회사, 심지어 단 둘뿐인 부부 사이에서도, 사실이 왜곡되면 그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손해배상이 청구된다. 이 비용은 한 번에 몰아서 청구되지 않는다. 비용은 배가 되어 활동 전반에 널리 퍼져 조금씩 청구된다. 이런 분산성 때문에 그 위험도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최종 청구 금액을 합산해 보면 처음보다 복리로 불어난 비용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용'은 금전적인 부분에 한정되지 않는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도 충분히 비용의 영역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예가 '갈등'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보았을 것이다. 지극히 사소한 갈등으로 시작된 분란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험 말이다. 처음엔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던 문제가, 결국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관계의 파탄으로 귀결된다.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도화선에 붙은 불을 애써 외면하는 셈이다. 그러나 도화선을 타고 간 불이 마침내 폭탄에 닿으면, 그때는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
이를 종합해 보면, 틀림을 다름의 영역으로 옮기는 행위는 거짓 윤리로 포장된 현실 도피일 수 있다. 찰나의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윤리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도피는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요구한다. 설사 그 대가를 자신이 치르지 않더라도, 주변의 누군가가 대신 떠안기 마련이다. 실로 민폐가 아닐 수 없다. 두려움 때문에 병세를 외면하면서 자연 치유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병세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지수적으로 증가한 비용을 강제로 청구한다. 이렇게 자가 증식한 질병은 일상의 일부가 되어 삶 자체를 갉아먹는다. 마치 말기 암 환자에게 암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리듯이.
4. 틀린 건 틀린 거다.
틀림은 사실 판단의 영역에서, 다름은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한다. 두 표현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때 진실은 왜곡되고 존중이 훼손된다. 그럼에도 '다르다'라는 표현이 지닌 윤리적 이미지에 힘입어 두 영역이 점점 더 뒤섞이고 있다. 물론 사실의 영역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다른 의견'은 '사실의 틀 안에서 이를 검증하기 위한 서로 다른 방법'을 의미한다. 나는 이 검증법의 집단을 '사실의 테두리'라고 부른다. 이는 논리적·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그룹 1)
1 + 2 = 3
4 - 1 = 3
6 ÷ 2 = 3
위와 같은 등식은 모두 같은 결과값 3을 향하지만, 그에 이르는 좌변은 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등식들이 모두 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
(그룹 2)
1 + 4 = 3
4 - 2 = 3
6 ÷ 3 = 3
이 등식들은 거짓이다. 이런 거짓 등식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의 범주에 속한다. '그룹 1'은 사실의 테두리 안에, '그룹 2'는 사실의 테두리 밖에 있다. 사실의 테두리 안에 있는 다른 검증법은 사실을 전제한 '다른 의견'이다. 반면 사실의 테두리 밖에서 제시된 검증법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거짓을 전제한 '틀린 의견'이다. 두 그룹이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이유다. 윤리라는 허울 좋은 방패 뒤에 숨는다 해도, '틀린 의견'이 '다른 의견'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 윤리가 '언어의 표면적 사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회의적 시선 자체는 중요하다. 이 글 또한 언어를 향한 회의적 시선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경험과 논리로 검증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대상을 겨우 몇 마디 말로 훼손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유아적이다. 여러 분야의 리소스로 검증된 대상을 목에서 흘러나온 한 줌 공기로 무마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나르시시즘적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고자 한다면, '다른 의견이니 존중해 줘'라는 한마디 말보다 훨씬 책임감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입증의 책임은 그 의견을 제시한 당사자에게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작위 행인에게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씌웠을 때, 이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은 그 행인이 되고 말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세상에 100% 사실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정곡을 찌른 질문이다. 100% 사실이란 것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 사실이라 굳게 믿어온 것들조차 -지동설, 물의 화학식, DNA 구조 등- 언젠가는 수정되거나 뒤집힐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문조차 우리가 언어에 지나치게 강력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사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문자 그대로 '완전무결'을 기대한다. 하지만 '사실'은 100% 완전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저 '사실 함량'이 높은 대상을 가리킨다.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 보자. 당신은 지금 평소 다니던 길 위에 서 있다. 이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당신의 위치가 조금 바뀐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해서, 이게 무슨 사고 실험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100% 장담할 수 있는가? 그 자리에 싱크홀이 있을 확률은 전혀 없는가? 교묘한 각도로 거울이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은? 그럼에도 우리는 당연하게 '발을 내디뎌도 괜찮다'라고 믿는다. 당신의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실'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실체다.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사실 함량'이 높은 것을 가리켜 '사실'이라고 부른다. 이 메커니즘은 우리의 일상에 매우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사실의 기준이 함량의 차이에 있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알기 어렵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공기의 실체를 알게 된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일수록 인지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 그러나 인지하기 쉽지 않다고 해서 그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입에 담는 '사실'이란 결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100%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실 자체를 부정해도 된다고 여기는 태도는, 검증 기준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정하는 편법일 뿐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는 지나치게 높은 검증 기준을 집요하게 들이밀면서, 정작 자신의 틀린 의견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검증 기준을 살짝 대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실제 현실적으로 검증 가능한 기준이 아니라 수사적 말장난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 과정에는 어떤 객관적 기준도, 합의된 잣대도 없다. 그저 턱없이 부족한 사실 함량을 가리기 위한 레토릭적 눈속임만 남을 뿐이다. 생각해 보자. 친자 확인 결과 99.98%의 유전적 일치가 나왔는데도 나머지 0.02%를 이유로 내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은가?
5.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서두에서 언어가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투영하기 때문에, 언어 또한 이분법적으로 작동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곧 이 글 역시 이분법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각인된 모순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안을 극단적인 상대성 속에 내던져 둘 수는 없다.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혼란이자 방임이다. 상대성도 결국 어떤 고정된 틀 안에서만 작동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또한 빛의 속도라는 일정한 물리 법칙을 전제로 성립한다.
나는 '틀림'과 '다름'을 구분 짓는 고정된 틀이 바로 '검증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남성과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에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장애인은 일반인과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기에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이것들은 별도의 검증이 필요 없는 가치 판단의 문제다. 반면 지구 평면설, 기후변화 부정론, 백신 음모론, 주관적 성별 결정론 등은 광범위한 경험적·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며 혼란만 조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설(가설)'이나 '론(이론)'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것조차 부적절하다. 그러한 명칭은 '개소리(Bullshit)'를 검증 가능한 대안 이론인 것처럼 착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런 걱정이 들 수 있다. '아무리 상대가 틀린 의견을 제시해도, 면전에서 '틀렸어'라고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 분명 타당한 걱정이다. 그래서 왜 틀렸는지, 무엇이 옳은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주장에 직면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인본적 방식이며, 진실이 왜곡되고 거짓이 우위를 점하는 상황을 막는 윤리적 행위이다. 최소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는 말 한마디로 넘겨버리는 일만큼은 자제해야 한다. 그것은 상당히 나태한 태도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의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또 다른 걱정도 뒤따른다. '내가 틀렸다고 한 주장 자체가 틀렸다면 어떻게 하지?' 물론 우리의 주장 또한 틀릴 수 있다. 하지만 틀리면 또 어떤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교정한 뒤, 더 넓어진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만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성장은 긍정성 위에 쌓이지 않는다. 성장은 부정성 위에서 출발한다. 기존 건물 위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구조의 일부를 허물어야만 한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때,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뿐 아니라 성장의 기회도 함께 얻는다.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곧, '틀렸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하다. 이 용기는 자기 성찰의 다른 이름이며 성장의 출발점이다. '틀림'과 '다름'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 안의 감시자가 남들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이 두 개념의 혼동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 곳곳에서 허무맹랑한 의견들이 사실 위에 군림하게 된 데에는 우리의 안일한 대응도 한몫했다. 지금이라도 틀린 것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틀린 것을 향해 당당하게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