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라는 가족의 의미와 발견
명실공히 나는 비혼 주의자다. 솔직히 말해 비혼주의자가 되기까지 큰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어려서부터 막연하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생의 어느 순간 이후로 결혼에 대해 회의적이었을 뿐인데, 어느새 남들이 나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나 또한 남 앞에서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저는 비혼주의자입니다. “
결혼이 비둘기처럼 다정한 가족을 만들어 준다는 환상은 원가족이 오래전에 산산이 부서 줘 버렸다. 아버지부터 오빠들까지 대를 이어 내려온 그들의 결혼은 서로를 향한 저주와 증오 그 자체였다. 또 오랜 세월 내게 가족이란 이사철마다 내다 버리지도 못하고 새로 가져가기도 싫은 오래된 봇짐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더는 사는 동안 가족의 수를 늘리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결말. 해서 연애를 하더라도 어느새 둘 사이에 결혼 얘기가 나오면 심장이 등 쪽으로 바짝 오그라 붙는 것처럼 숨구멍이 조여왔다.
그도 그럴 게 가족은 한평생 나를 힘들게만 했다. 이들은 한 번도 정상적인 그들의 역할을 한 적 없다. 어려서는 어쩔 수 없이 한 집에 모여 살긴 했지만 몇몇 조각들을 빼고는 다시 꺼내고 싶은 추억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폭력적으로 굴었다. 게다가 이들은 사는 동안 내내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으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기댔고 의지해 왔다. 그러니 당연히 머리가 굵어지며 서로 소원할 수밖에.
훗날 직장 때문에 혼자 살게 됐을 땐 외로움은커녕 되려 가슴이 터질듯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들 때까지 그 누구의 비명도 내 삶에 끼어들지 않는 고요한 삶이라니 어찌나 평화롭고 좋던지. 그러니 더더욱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비극과 희극 오십 프로의 확률이라. 그런 확률에 운명을 걸고 싶지 않았다. 이미 지쳤고 고단해서. 그렇게 젊은 날을 매일 같이 속이 뒤집힐 듯한 배 멀미 속에 보내고 나이 마흔을 넘겨 홀로 고요한 평화를 찾고 보니 더더욱 혼자가 좋았다.
타고나기를 독립적인 성격인 데다 살아온 환경까지 이 모양이니 나는 뭐든 혼자 제법 꿋꿋하게 해 내는 편이다. 되려 남한테 부탁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불편하다. 또 요즘은 세상이 좀 좋은가 인터넷으로 못 찾는 정보가 없으니 어지간한 건 혼자 다 처리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혼자여서 그럴까 늘 긴장감이 높은 인생을 살았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언제나 필요이상으로 잘하고 싶어 애를 썼다.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평가에 민감했다. 그러니 늘 피곤했다.
더러 연애를 했어도 내가 정상이 아니니 어디서 상처 입은 사람만 귀신같이 골라 사귀거나 그도 아니라면 멀쩡한 사람도 상처를 내 피투성이로 만들어 사귀곤 했다. 자극적이고 유해한 만남들이었다. 되려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 불편했다. 아마 익숙하지 않아서겠지. 그러다 보니 연애도 늘 파행. 내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연애도 끝냈다. 더는 남을 헤치거나 나를 헤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몸이 늙고 보니 혼자라는 게 아쉬울 때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은 생활 속에서 아주 가끔 찾아왔는데 예를 들면 숯불에 자글자글 구운 돼지갈비를 먹고 싶다거나 몸이 아파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였다. 이상하지? 다른 건 뭐든 다 혼자 다 할 수 있는데 어쩐지 요즘도 식당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밥을 먹는 것과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 접수를 하고 처방전을 들고 가 약을 짓는 일은 여전히 조금 어렵고 힘에 부친다.
그런데 이런 내 인생에 어느 날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개가 끼어든 것이다. 그때의 충격이란. 적막강산이 따로 없는 내 집에 나 말고 숨 쉬는 생명이 하나 더 있다는 건 과히 충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왜냐 개라는 동물은 온종일 나만 보는 게 일이었다. 이건 직접 개를 키우기 전엔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물론 이해는 한다. 개가 혼자 책을 보겠나 차를 끓여 마시겠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있지 온종일 나만 쳐다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물론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개가 나를 지켜보는 건 개한테 있어 생존이 걸린 문제다. 오로지 내 손을 통해 밥과 간식이 나오고 산책을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가 있지.
또 앞서 말했지만 당시엔 복주도 우리 집에 처음 와서 적응하느라 불안해서 그랬으리라. 하지만 나 역시 개를 처음 키우는 처지라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개가 원래 이러는 줄 알았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나만 보다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땐 개가 어려서 그런 거고 지금은 아니다. 다들 각자의 공간에서 잘 쉬고 잘 잔다.
앞서도 말했지만 입양 초기 복주는 혼자 남겨지는 걸 견디지 못했다. 이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난감했다. 커다란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 후 나는 자연스레 외출을 줄였다. 부득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그냥 좀 불편하더라도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가 책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출간 시기와 겹쳤다. 개가 집에 오기 전부터 외부 행사는 지방까지 줄줄이 잡혀 있는데 개를 혼자 두고 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거다. 어쩔 수 없이 출판사에 사정 얘기를 해 양해를 구하고 거의 모든 행사에 복주를 데리고 다녔다. 다행히 당시 담당 편집자가 개를 좋아했다. 다행이지 뭔가. 그래서 내가 녹화를 하거나 강연을 할 때 편집자는 내 개와 공원 산책을 했다.
코로나 시기여도 불러주는 행사장은 많았지만 개와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의외로 제한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당근마켓을 통해 인근에 사는 아르바이트를 구해 한동안 복주를 맡기고 책 홍보를 다녔다. 사실 전에 나는 개를 유치원에 보내고 시터를 부르는 사람들 보며 돈이 썩어 문드러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직접 개를 키워 보니 아니었다. 개는 인형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터와의 약속이 절묘하게 어긋났다. 일정 조율 과정에서 서로 오해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저녁 라디오 생방송이 잡혀있었다. 이를 어째 눈앞이 깜깜했다. 만약 그 시간에 복주를 혼자 두고 나가면 녀석은 또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런데 이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내가 방송국에 간다면 방송에 집중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못할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급하게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지금 당장 집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없다. 부를 사람이 없다.
딱 한 사람 작은 오빠를 제외하고, 그래서 오빠한테 오랜만에 전화해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전에 관계가 틀어져 한 오륙 년 연락을 안 했다. 한데 오빠는 기꺼이 술자리를 박차고 나와 우리 집에 개를 보러 와줬다. 오빠가 온다는 소식에 안도하고 그제야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만약 그때 오빠가 안 된다고 했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복주를 빈집에 두고 그대로 외출했겠지? 그러면 녹음하는 내내 마음이 몇 번이나 무너졌겠지? 아무리 혈혈단신 홀로 산다 해도 이토록 눈앞이 깜깜할 때 연락할 수 있는 데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더라.
이 일을 계기로 그 후에도 종종 오빠네 개를 맡겼다. 지방 일정이 있거나 외부 강연이 늦는 날이면 개들은 전부 오빠네 보낸다. 물론 돈을 주고 업체에 맡길 수 있지만, 나 역시 의심증에 불안증을 앓아 그런지 개들을 호텔에 보내면 마음이 안 좋다. 그래서 오빠네 맡긴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이 한 세상 내 힘으로만 굳건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얼마나 큰 오만이었던가 싶다. 또 걸레짝 보다 쓸모없을 거라고 자신했던 가족의 쓸모 역시 마찬가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을 때 결국 찾게 되는 게 결국 핏줄이라는 신물 나는 괴나리봇짐인가 싶다.
흔히 사람들이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인간 역시 그저 개처럼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이다. 아무리 잘 났다고 까불어도 인간은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다. 혼자서는 못 산다. 그렇다고 다른 오해는 말았으면 한다. 귀 밑머리가 희끗한 이 나이에 내가 새삼스레 웨딩드레스를 입겠다는 건 아니니.
하지만 개 하고 살다 보니 개라고 해도 무리를 이루고 사는 게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은 한다. 일단 사철 따뜻한 개를 안고 있으면 마음이 말도 못 하게 편안해진다. 힘든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이 있어도 개 옆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뛰는 가슴이 쉽게 진정된다. 세상에 이토록 직접적인 위로가 있을까 싶다. 누군가와 살을 맞댄다는 건 그게 털가죽을 입고 있는 친구라고 해도 큰 힘이 되는 듯하다.
사실 집에 개가 없을 때 나는 사는 데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며 살았던 것 같다. 혼자 산다는 이유로 남한테 우스워 보이기 싫어 자기 검열을 심하게 했다. 게다가 내 오랜 지병인 불안의 증상 중 하나인 강박과 결벽증도 앓고 있어 틈만 나면 쓸고 닦았다. 이 때문에 친구들이 불편해서 우리 집에 못 오겠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개들과 함께 살게 된 후로 적당히 더럽게 대충 산다. 현실적으로 하루 서너 번을 나가 산책하고 들어오는 개를 두 마리나 매번 발을 닦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 타협했다. 여긴 한국 속 미국이고 나는 침대와 식탁에서 생활하고 개들은 바닥을 마음껏 어지럽혀도 된다. 협소한 내 마음의 경계가 공간 안에서도 어느 정도 느슨해진 것이다.
또 녀석들 때문에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며 이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전혀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 친구가 됐다. 지역도 성별도 나이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오로지 함께 개를 키운다는 공통점 하나로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타인과 연결되니 어떤 의미로든 세상을 배우고 사람을 경험하게 됐다.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 회사는 물론이거니와 미용실도 치과도 옷집도 한 번 가면 이십 년 삼십 년씩 다닌다. 사람은 다를까. 이런 내 성격에 나이 마흔 넘어 새로운 친구 만들기가 쉬울까. 천만에 그런데 만들었다. 전부 개들 덕분이다.
전에 우리 수녀님이 ‘선민 씨 사람은 혼자 못 살아요’라고 했을 때 속으로 수녀님은 대체 왜 저런 말을 할까? 했다. 그때 나는 영원히 독야청청 혼자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꼭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호되게 다시 아파 보고 또 이웃과 어울리고 남의 도움을 받고 이렇게 개와 나란히 누워 같이 웃고 그러니 그때 수녀님이 어떤 의도로 말씀하신 건 줄 알 것 같다. 아마도 예전처럼 밖으로 난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그지 말라는 말 같다. 타인과 세상을 향해 조금 더 나와 보라는 얘기 같기도 하고. 어쨌든 개 하고 사는 건 이전의 내가 상상도 못 할 만큼 훨씬 더 행복하다. 그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