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지상준 엄마 강지은 님 이야기
상준이는 안산에서 태어났어요. 개인 산부인과 다니다가 막달에 애가 거꾸로 서기도 했고 빈혈 수치도 낮고 해서 안산 고대 병원으로 갔고 거기서 낳았죠. 상준이 낳을 때 우여곡절이 진짜 많았어요. 에 태어나는 날이 하필 집 이사하는 날이었어요. 첫애인데도 상준이가 예정일 보다 일찍 나왔거든요. 21일이나 빨리요, 게다가 애가 목에 탯줄을 감고 나와서 더 위험했죠. 호흡을 제대로 못 했거든요.
그날따라 응급 산모들이 어찌나 많은지 인큐베이터도 없어서 난리였어요. 병원에서는 임시 호흡기 달아줄 테니 서울로 애 데리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안된다고 막 우겼어요. 그렇잖아요. 가다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해요. 다행히 뚜껑 없는 인큐베이터 겨우 받아 병실에 애를 넣었죠. 애가 너무 작았어요. 2.75킬로그램 밖에 안 나갔으니까요. 가슴을 많이 졸였어요. 하루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3일 지나니까 애는 두고 엄마인 저는 나가라는 거예요. 병실 비워야 한다고 안 된다고 통사정을 해도 여지없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하는 수 없이 집에서 출퇴근하며 애를 봤어요. 근데 희한한 게 우리 상준이가 그 째끄만 애가 눈 가리고 호흡기 달고 있으면서도 엄마를 알아보고는 손을 꼭 잡았어요 정말이지 신기했어요. 엄마를 어떻게 알아봤을까요. 그죠. 그렇게 상준이는 병원에 꼬박 2주 있었어요. 말도 못 하게 애를 태웠죠. 애들 키울 때 어디 가서 무릎만 좀 까져와도 속상한데 말도 못 하는 그 쪼끄만 애가 아프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요. 말도 마세요.
상준이는 유독 친할머니가 많이 예뻐하셨어요. 양가 어른들이 다 예뻐하셨지만 유독 할머니가 많이 예뻐하셨죠. 시댁의 첫 손주였거든요. 정말 예뻐하셨어요. 태몽을 대신 꿔주실 정도로요. 상준이도 할머니를 잘 따르고요. 나중에 어머님한테 들었는데 사고 나던 날에 상준이가 할머니 찾아가서 인사했다고 해요. 뒤에 친구들 두엇 데리고 와서는 현관문 앞에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라지더래요. 그런데 상준이 뒤로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고 그래요.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상준아 들어와라 들어와라 하는데 그냥 가더래요. 그런데 되게 환한 데로 갔다고.
불안한 저녁
사고 이후에도 상준이가 한참 올라오지 않아 애를 태웠죠. 상준이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갈 때 왔는데, 그때 제가 팽목에 가서 계속 절을 했어요. 우리 상준이만 올려 달라고 한 건 아니고요. 그냥 배에 아직 계신 한 분 한 분을 떠올리면서 계속 절을 했어요. 옆에 스님들이 때마침 기도를 하고 계셔서 저도 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기도할 때쯤이 스님들 기도 마치는 시간이었나 봐요. 다들 들어가시더라고요. 그런데 딱 한 스님이 제 옆에서 끝까지 지켜 주시며 함께 기도해 주셨어요. 그날 무슨 정신으로 절을 했는지 몰라요. 나중에는 막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리더라고요. 그러고 체육관으로 왔더니 애 아빠가 저 어떻게 됐을까 봐 난리가 났더라고요. 온다 간다 말없이 팽목에 갔던 거라. 연락이 안 돼서 놀란 모양이더라고요.
안 그래도 남편이 진도에 첫날 내려왔을 때 내가 정신 놓고 까무러치니까 저를 붙잡고 너까지 이러면 우리 아들 못 찾는다 정신 차려라. 하더라고요. 첨엔 그 말이 야속했는데 맞는 말이더라고요 그 얘기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렇지. 어미라는 게 이렇게 나약하게 이러고 있으며 안 되지. 속으로는 무너질지언정 겉으로는 정신을 차렸어요. 아들 찾는 게 먼저다 이를 악물었죠. 기도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날 새벽에 상준이가 왔어요.
상준이는 수학여행 안 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남편하고도 잠깐 보내지 말까 하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수학여행을 빠질 특별한 이유가 없는 거예요. 선생님한테 뭐라고 해요. 애가 가기 싫다고 한다. 할 수는 없잖아요. 아니 그건 둘째치고 남들 다 가는데 저 혼자 안 가면 어떡해요. 친구들 사이에서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애를 설득했어요. 그냥 가라. 일단 가서 도저히 못 있겠으면 전화해라 하고 달래서 보냈어요.
그런데 제 마음이 이상한 거예요. 애를 막상 보내놓고는 공연히 그때부터 불안하더라고요.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은 태어나 처음이었어요. 어떻게 하지를 못할 정도로 종일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15일에 하루 종일 혼자 전전긍긍하다 저녁에 몸 아프다고 핑계 대고 약속도 다 취소하고 집에 와 있었어요. 근데 잠도 안 오고 불안하고 마음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아니나 달라 아침에 보니 사달이 났더라고요.
예쁜 아이
상준이는 어려서 되게 예뻤어요. 어디 데리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들 여자애냐고 할 정도로 예뻤어요. 삶은 계란 까 놓은 것처럼 뽀얗고 이뻤어요. 상준이 다섯 살에서 여섯 살 될 때까지 제가 애들 끼고 살았어요. 진짜 우리 상준이 너무 이뻤어요. 근데 애가 작게 태어나서 그런가 좀 예민해서 돌 때까지 분유도 백미리 백이십 미리밖에 못 먹었어요. 모유도 짜서 버리기 일쑤였어요.
애가 잠도 길게 못 잤어요. 밥을 많이 못 먹어 그랬나 잠도 길게 못 자더라고요. 어깨에 이렇게 얹어서 재우면 또 도중에 안 깨고 잘 잤어요. 그렇게 애를 어깨에서 길렀어요. 실제로 어깨가 빠졌었어요 (웃음) 애 아빠가 안고 제가 안고 그렇게 품에서 키웠어요 우리 상준이는. 아마 애가 작고 약하게 태어나 더 애지중지 키웠던 것 같아요.
두 돌 지나니까 그때부턴 잠도 잘 자고 잔병치레 없이 잘 크더라고요. 그때부턴 좀 편해졌죠. 근데 커서도 입맛은 좀 까다로웠어요. 나중에 사춘기 오면서 변성기 오고 목소리도 바뀌고 그러니까 말수가 확 줄더라고요. 그전엔 조잘조잘 얘기도 잘했죠. 중학교 올라가더니 애가 차분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우리 애 머리가 악성 곱슬이에요. 제가 보기엔 괜찮은데 본인은 그걸 또 그렇게 싫어했어요. 아무래도 한창 외모에 민감할 나이라 그랬겠죠. 그래서였나 이 녀석이 그때부터 사진을 안 찍을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상준이 커서 찍은 사진이 거의 없어요. 나중에는 그게 너무 한이 되는 거예요. 사진을 하도 안 찍을라 그래서 안 찍었는데 억지로라도 좀 찍어놓을 걸 그랬나 싶고.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모든 게 후회죠. 후회 안 되는 게 없죠. 제일 속상한 건 애랑 속 깊은 얘기를 못 한 거예요. 이상하게 저는 상준이랑 얘기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기억나는 게 없어요. 우리는 맨날 시시껄렁한 얘기만 한 거예요. 속 깊은 대화도 못 하고. 그게 그렇게 후회되더라고요. 상준이 얘기를 좀 진지하게 들어줄 걸 후회. 우리는 맨날 농담이나 하고 그랬으니까.
저는 상준이가 너무 이뻐가지고 중학교 때까지 옆에 끼고 잤어요. 덩치도 큰데 애가 또 곧잘 아기 같은 짓을 했어요. 제가 소파에 앉아 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와서 애기처럼 두 팔 가득 안겨요. 기럭지도 길고 등치도 큰 게요. 네 고등학교 때도 그랬어요. 애가 길어서 품에 다 안 들어오는데 그렇게 와서 한 번씩 안겼다가고 그랬어요. 그러면 가족들이 다 애정결핍이라고 놀렸죠. 언제 한 번은 자꾸 와서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어디서 보니까 하루에 3번 사랑한다 소리 들으면 암에 안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상준이는 다 커서도 종종 애기짓을 했어요. 말썽은 안 부렸는데 개구진 데가 있었다고 해야 할까? 어디 갔다 오면 숨어있다가 나와서 ‘워’ 하면서 놀라게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애가 어떻게 된 게 밖에서 먹는 밥보다 제가 해주는 밥을 유독 좋아했어요. 치킨이니 피자니 이런 것도 한두 점 먹으면 땡이에요. 그런데 제가 해 주는 건 그냥 뭐든 잘 먹었어요. 그러니 신나서 해 먹였죠. 먹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거저거 요리도 다양하게 해 보고, 그런데 상준이 그렇게 되고 나서는 상준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식탁도 못 보겠더라고요. 우리가 네 식구라 각자 늘 앉았던 자리가 있거든요.
순한 아이는 봄꽃과 함께 떠났다
우리 애가 얼마나 엉뚱한 구석이 있냐면 아빠하고 싸우고 나서 상준이한테 “엄마 아빠랑 이혼할까” 하고 물으면 “십 년만 있다 해” 이래요. 그래서 “왜?” 하고 물으면 자기 대학 나오고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혼하래요. 그래서 “그때는 괜찮겠어?” 하니까 "십 년이나 참고 살아놓고 다 늙으면 뭐 하러 이혼해 그냥 살아 이래요." 웃기죠.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 해가 유독 봄꽃이 예뻤어요. 진달래니 개나리 벚꽃이 죄 다 한 번에 펴서 정말 예뻤거든요. 그래서 가족끼리 꽃 보러 가자 하니까 상준이가 뭐라는지 아세요? 학교 가는 길에 맨날 보는 게 꽃인데 뭐 하러 또 나가서 보냐고 그래요. 틀린 말은 아니에요. 단원고 쪽으로 꽃이 참 예뻐요. 그래서 상준이 집에 두고 저희끼리 꽃을 보고 왔다니까요. 그래서 맨날 식구들이 상준이를 독거노인이라고 했어요.
상준이는 장래 희망이 공무원이었어요. 재밌는 애죠? 지극히 현실적인 아이였어요. 자기는 일생을 튀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했어요. 어린애가 웃기지 않아요? 오죽하면 좌우명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겠어요. 그러면서도 애가 호기심은 굉장히 많았어요. 일단 책 읽는 걸 참 좋아했어요. 용돈 주면 거의 책 사는 데 썼던 거 같아요. 소설도 혼자 끄적이기도 하고. 상준이는 나름 책 읽고 우리한테 토론하자고도 했는데 저희가 그걸 못 받아 준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 대구로 이사를 갔어요. 거기서는 애들 데리고 산이나 박물관이나 도서관으로 많이 놀러 다녔어요. 그때 상준이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를 대구서 다니다 중학교를 다시 안산서 다니게 되니까 친구가 없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더라고요. 여럿이 어울려 함께 잘 지냈어요. 그래도 혼자 게임하는 걸 어지간히 좋아했는지 중학교 때 롤링 페이퍼 보면 상준아 게임 좀 그만해 소리가 적혀있더라고요.
몰려다니는 친구들은 많았어요. 친구는 많았는데 여자 친구는 못 사귄 거 같더라고요. 성격이 또 그러니까 고백도 못 하지 않았을까 나중엔 그것도 한이 돼요. 여자 친구라도 사귀어 보고 갔으면 좋았겠다 싶었죠.
심부름도 시키면 군말 없이 곧잘 했는데 저는 상준이가 아까워서 제가 그냥 다 했어요. 아니면 남편 시키고. 모르겠어요 저는 애가 그렇게 아까웠어요. 말썽도 안 부리고 손도 안 타고 하니까 더 그랬던 거 같아요. 정말이지 걔는 손이 안 갔어요. 잘 때 되면 저 알아서 자고 일어날 때 되면 따로 안 깨워도 혼자 알아서 일어나고 책 봐도 착착 다시 꽂아 두고 그러니 예쁘죠.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 저한테 상준이가 딱 그랬어요. 제가 그래서 어느 날은 상준이한테 상준아 엄마는 짱구가 좋다 상준이가 말썽쟁이 짱구 같았으면 좋겠다 말썽 좀 부려라 소리를 했을 정도예요.
당연히 동생이 질투했죠. 근데 애들 어려서는 서로 질투했어요. 상준이는 상준이대로 동생이냐 자기냐 누굴 더 좋아하냐 묻고 동생은 동생대로 오빠냐 자기냐 그 자리에서 선택해라 하고, 그러면 너는 엄마가 최고로 사랑하고 너는 엄마가 가장 사랑해하죠. 그러면 둘 다 안 된대요. 당장 고르래요. 서로 그러면서 컸던 거 같아요. 그런데 오빠가 그런 일을 겪고 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까 어느 날 딸애가 오빠 대신 자기가 갔어야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 후로 정신 차리고 애하고 같이 상담 다니고 딸아이만 따로 상담 보내고 그랬죠. 그래도 딸아이한테는 살면서 갚으면 되니까, 갚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이 있으니까 괜찮은데 먼저 간 애한테는 그게 안 되니까 미안하죠. 계속 미안해서 그러는 거죠.
엄마 나는 오빠가 있다고 해야 해 없다고 해야 해?
딸아이도 많이 혼란스러워했죠. 언제 한 번은 딸아이가 "엄마 나는 오빠가 있다고 해야 해 없다고 해야 해?"라고 묻는데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저희가 사망 신고를 이제야 했거든요. 원래는 가족협의회에서 암묵적으로 진상규명 되면 사망신고 하자 했거든요. 그래서 아직 사망신고 안 한 가정 많아요. 그런데 딸아이가 자라고 취업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가족관계 증명서에 오빠가 떡하니 있으니 사람들이 물어볼 거 아니에요. 그러면 애가 오빠에 대해서 말을 해야 되는데 그게 좀 힘든 거 같더라고요.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할 수도 없고 그게 거짓말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이 특별한 시선으로 딸아이를 대하고. 그래서 가족 논의 끝에 이번에 사망신고를 하게 됐어요.
애 생각을 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죠 뭐. 한다고 했어도 미안해요. 모든 게 다 미안해요. 우리 딸도 그 말해요. 엄마는 그 시기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라고요. 그런데도 부모 마음 희한한 게 자꾸 못 해준 것만 생각나요. 잘 해준 건 왠지 당연한 거 같고 엄마로서 마땅히 해줘야 하는 역할이었던 거 같고요. 그냥 계속 못 해준 것만 생각나요. 하나부터 열까지 그냥 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잖아요. 대학 가고 군대 가고 결혼하고 그런 꿈을 펴 보기도 전에 애가 갔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마음 깊은 데서 커다란 문어가 나를 심연 속으로 잡아 끌어당기는 거 같아요.
지난 십 년이라,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날 이후로 저희 시계는 멈춘 거 같아요. 매일 마음속에 오만 가지 번뇌가 일죠. 이걸 해서 뭐 하나 내 아이는 여기에 없는데 하는 생각과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움직여야지 내가 밖에 나가서 나 지상준 엄마 강지은이다라고 얘기해야 우리 상준이가 잊히지 않지 하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 보면 나가는 게 맞는 선택이더라고요 그래서 나갔어요. 그렇잖아요. 애들이 수학여행 가다 죽었는데 그 일로 비난받고 잊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세월호 이전에도 이런 사고는 너무 많았어요, 그럼 앞에 있었던 참사처럼 나도 그 일을 개인의 아픔으로 그냥 치환해 버리면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럼 나가서 행동하는 게 맞더라고요. 부모니까. 엄마니까. 부모니까 포기하지 않는 거죠. 아니 포기하지 않는다가 아니에요. 포기할 수 없다에요.
시내에서 투쟁할 때 전경들하고 몸싸움 심하게 하면 막 멍들고 다쳤어요. 우리는 일반 시민이고 걔들은 무술 유단자에 덩치도 이렇게 크니까 우리가 다치죠. 그렇게 서울 다녀오면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딸이 그래요 "엄마 오늘은 안 나가면 안 돼" 그래요. 그러면 "엄마니까 나간다 열 달 품고 낳아서 길렀으니까 간다." 했어요. 이런다고 우리 애가 돌아오지 않는 건 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나가고 행동할수록 우리 상준이 같은 애가 더는 안 생기겠다는 희망은 있죠.
우리 애가 사고 당일에 또 전화가 안 터졌거든요. 그때 통신사 하나만 됐는데 우리 애가 안 됐어요. 전원도 꺼져있었고요. 다른 애들은 톡이나 문자도 보냈던데 우리 애는 안 그랬어요. 애가 또 핸드폰을 안 바꾼다는 거예요. 남자애라 그런가 무던해서 그런 걸 또 안 따져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별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핸드폰이라도 좋은 걸 사줬으면 살았을까 하는 생각들. 아마 이런 죄책감과 죄의식은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계속될 거 같아요.
만지고 싶다
숨을 못 쉬겠어요. 수시로 숨이 막혀요. 가슴이 꽉 막혀서 숨을 잘 못 쉬겠어요. 명치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한의원서 그래요, 화병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침을 맞고, 별걸 다 해도 안 돼요. 제가 어금니를 8개를 요전에 임플란트로 바꿨어요. 애가 보고 싶어 하도 이를 앙다무니까 어금니가 다 깨지고 나중엔 잇몸이 녹아내리더라고요.
다른 어떤 것보다 괴로운 건 그리움이에요. 그리움을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이 마음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요. 또 이 일이 그렇잖아요. 차라리 죽일 놈이 딱 하나야 그럼 그 사람만 열렬히 미워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그런데 그것도 아니잖아요. 대상이 특정 지어지지도 않고요. 그러니 더 괴롭죠. 정말로 저는 우리 애를 너무 만지고 싶어요. 우리 상준이 볼살이 얼마나 보들보들한지 아세요? 진짜 아기 같거든요. 끌어안고 그 볼을 막 비비고 싶어요. 또 앙상한 손도 만지고 싶고, 그게 제일 괴로워요.
특히나 명절 때 이럴 땐 사무치게 그립죠. 추석부터 크리스마스 연말 가족들 모여 어디 가고 웃고 떠들고 그러는 거 보면 저도 모르게 멍하니 봐요. 우리 애도 살아있으면 저만 할래나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저도 모르게.
아직 갈 길이 멀죠. 그래도 부모니까 하려고요. 엄마니까 포기하지 않고 우리 애 죽음이 헛되지 않게 더는 이런 식의 끔찍한 죽음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게 애써야죠. 알려야죠. 우리 집 같은 가정이 또 생기면 안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