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살아남는다.
언젠가부터 과학도서 그중 진화 생물학 관련 책을 자주 읽고, 그 안에서 위로를 받는다. 원래 무질서와 혼돈이 우주의 질서라는 말도 좋고, 강하고 센 놈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하는 그들의 이야기도 좋다.
여태 읽은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Survival of the Friendliest> 두 개의 책이다. 또 최재천 선생님과 제인구달 박사님의 사상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마도 이 생소한 분야에 끌리는 건 좀 거창하지만 “다양성을 존중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 가치가 평등하길 바라는 이들의 순수한 희망을 사랑하기 때문" 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더는 인간에게 희망을 찾기는 힘들어졌으므로, 책으로라도 지식으로라도 접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물론 개를 키우기 때문에 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개를 이해하고 싶어서 동물행동학 관련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다가 개에 대한 칼럼을 쓰려고 진화 심리학자들의 영역까지 넘어왔으니.
아무튼 이들의 영상을 넘겨보다 이들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연구자들의 눈이 다 소처럼 크고 선하다는 것이었다. 아마 매일 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동물을 들여다보다 보니 그들처럼 순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연 마흔 넘은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더니. 젊음이 지나간 후의 얼굴은 스스로 만드는 거라더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동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선하다. 그래서 더 좋다.
여러 학술자료에서 이미 밝혀졌다시피 사회적 동물 아니 무리 지어 사는 동물인 인간 역시 여태 “서로의 다정함에 기대어 생존해” 왔다. 다정한 개체에게 더 많은 번식의 기회가 있어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문화에서는 다정함이나 착함 같은 가치는 오히려 단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이 양보와 배려보다는 실속과 불이익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쌀쌀맞고 싹수없는 행동을 쿨하다고 치켜세우고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을 오지랖 피운다며 후려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는 더더욱 남에게 친절한 행동을 할 때 이 전 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과연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오지랖일까 아닐까.
나 같은 경우는 본래 오지랖이 넓다. 어려서부터 누가 길에서 지도를 들고 헤매고 있으면 도와 달라고 안 해도 가서 먼저 도와줬고, 비바람을 못 이기고 길가에 입간판 같은 것들이 쓰러져 있으면 오가는 사람 다니기 좋으라고 한 데 바로 세워 놓고 갔다. 그뿐인가 누가 유모차나 짐수레를 끌고 계단을 오르면 무조건 달려가 도왔다.
그런데 이런 나를 주변 사람들은 좀 희한하게 여겼다. 그런데 글쎄 나는 한 번도 이런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 한 적 없다. 아니 그렇잖아. 안 봤으면 몰라도 봤잖아. 봤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마 나는 그때 진도 팽목항에 가 두 눈으로 그 참극을 제대로 안 봤다면 아마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그게 안 되더라고. 안 봤으면 몰라도 봤는데 어떡해. 밤낮으로 조명탄이나 탕탕 쏘면서 아무도 바다에 나가 구조하지 않는 걸, 자식의 부고를 듣고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울던 엄마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걸 어떻게 모른 척하고 살아.
그러니 어떡해 앞으로는 아주 눈을 질끈 감고 다니던가 아니면 이 빌어먹을 성격을 백 팔십도 바꾸던가 해야지, 한데 어디 성격 바꾸는 게 말처럼 쉽냐고, 오죽해 성격을 바꾸면 팔자가 바뀐다는데 그게 쉬울 리가 있냐고. 뭐 그러니 하는 수 없지. 이제 내 ‘오지랖’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없지. 나 같은 사람도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굳건히 마음을 다 잡으며 말이지.
그게 왜 나여야만 하는가 같은 질문은 잠시 뒤로 하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