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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Sep 23. 2024

21화_개들과 함께 카르페디엠, 메멘토모리

개들을 통한 치유의 날들

<카르페 디엠 carpe diem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개들의 언어에는 미래도 과거도 없다. 오로지 현재뿐이다. 개 하고 이야기할 땐 이런 말이 안 통한다. 어제 간식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안 돼. 라든가. 내일 놀러 갈 거니까 오늘은 일찍 자. 같이 ‘지금 당장’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해 개한테 설명하기란 참으로 고달픈 일이다.


한데 그 덕에 또 개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앞당겨 고민하지 않고 매일 새로 주어지는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개들을 보면 저렇게 사는 것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거짓과 헛됨이 하나도 없는 그들의 삶이 부럽기까지 하다.


매일 똑같은 길로 산책을 나가도 매일 새롭게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게 걷고 같은 사료를 주고 또 줘도 날마다 꼬리 치며 좋아하는 그들의 삶에는 인간에겐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낙관”이 있다. 그래서일까 입고 있는 털가죽 외에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불안에 떨지 않고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가만히 보고 있자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남 보다 일찍 나는 생과 사의 경계가 계란 껍데기만큼이나 얇다는 걸 알아 버렸다. 우리의 삶이라는 건 그저 싱크대 모서리에 두 어번 툭툭 치면 깨져 버리는 계란 껍데기처럼 얇은 허상이란 걸 나는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알아버렸다. 그 시절 나는 누구보다 죽음으로 깊이 침잠했다. 말하자면 가장 빛나야 할 시기에 가장 어두웠고 가장 밝아야 할 시기를 가장 침울하게 보냈다.


그 후로 두 어번 죽음의 능선을 넘었는데 그 경험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산다고 생각하면 어려웠지만 죽는다고 생각하면 뭐든 쉽고 간단했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 나는 생의 크고 작은 고비마다 여차하면 죽어 버려야지 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왕 죽을 거 빨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덕분에 내 생은 전체적으로 취약했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속이 뒤 틀리면 남이고 나고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아무나 할퀴며 살았다.


꽤 오랜 세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남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해 괴로웠고. 사람들과 섞이면 섞일수록 힘들었다. 조증과 울증을 반복하는 우울증을 지독히 오래 앓았다. 병증이 심할 땐 팔목과 손등을 긋는 자해도 서슴지 않았다. 이 십 년 가까이 병은 좋아지다 나빠지길 반복했다. 다행히 생의 위기마다 주위의 좋은 사람들이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고 옆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려줬다. 또 운 좋게 실력 있는 정신과 선생님의 치료 덕분에 상태가 많이 호전돼  생의 어느 지점부터는 남은 생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살게 됐다. 다행히 더는 자다 일어나 손목을 긋지 않는다.


마흔 넘어 어느 날부터 내 마음과 생각을 글로 옮겨 적었다. 근본 없는 글쓰기는 지금도 엉망이지만 그때는 더 했다. 한데 그 잡문을 좋게 봐준 출판사가 있어 운 좋게 얼추 모아 책으로 낼 수 있었다. 책이 나오자 세상의 반응은 호의와 냉대로 적절히 나뉘었다. 내 기준에선 선방이었다.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으므로.


중요한 건 책을 내고 난 후였다. 출간 이후 오랫동안 나는 극심한 무기력과 허무를 겪었다. 일종의 상실이었다. 그간 나를 버티고 있던 이야기들이 내게서 빠져나간 뒤의 공허함이랄까. 그도 아니라면 딴에는 더는 세상에 무고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해 썼는데 내 글로 인해 조금이라도 세상이 바뀌길 바라며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가 조금도 세상에 가 닿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무기력이었다.

<저는 삼풍생존자입니다> 책이 나온 이듬해 사건 이후 7년이나 끌어온 재판의 결과가 나왔다. 법원은 기소된 피의자 전원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 흔한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 하나 적용하지 않았다. 결과를 전해 듣고 참담했다.


그뿐인가 그 후로도 세월호는 계속 우리 사회 안에서 가라앉았다. 이태원의 한 골목에서 오송의 지하차도에서 작업장에서 공장에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은 배신하고 공직자는 부인하고 언론은 적당히 눈 감을 감아줬다. 그렇게 세월호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이런 일을 겪으며 더는 글을 쓰지 말자. 했다. 거대한 바위처럼 틀고 앉은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책 한 권이면 됐지. 싶었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 후 나는 자궁근종 수술 후유증을 무섭게 앓아 여러 차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실려갔다. 갑자기 한 걸음도 떼지 못할 정도로 배가 아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뒹굴었다. 코로나 때 받은 수술이 잘못 돼 자궁에서 피가 계속 새어 나와 배 안에 고여 썩었다. 까무러쳐 병원으로 실려가던 당시엔 왜 그러는지 원인도 몰랐다. 입원해 항생제 치료만 받고 나오길 여러 번 했다. 응급실 의사는 이런 나를 보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염증 수치라고 하며 염증 수치가 높아 섣불리 개복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마약성 진통제에 취해 자다 깨다 반복하면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다른 침대의 인공호흡기 소리와 내 손끝에 집게로 연결된 심장 박동기의 일정한 전자음이 들려왔다. 그러면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하다가도 나 가고 나면 우리 개들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소리도 못 내고 비죽비죽 울기만 했다.


열에 들뜬 밤에는 깨어있어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헛소리를 하다 까무러치기를 반복했고 일어나 보면 환자복은 물론이고 침대 시트까지 전부 땀으로 젖어있었다. 무엇보다 이럴 때 간병해 줄 사람이 없어 서러웠다. 가족도 친구도 있어도 없는 처지와 같으니 더 했다. 어느 날은 환자복 너무 서러워 친한 수녀님께 전화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러자 할머니 수녀님들이 찾아와 주셨다.


나중에 대학병원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골반 근처에 죽은 피가 잔뜩 고여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 몸 안에 고인 끈적하고 검은 피를 빼기 위해 마취도 없이 긴 주사기를 밑으로 꽂아 피를 뺐다.


병원에 누워서는 종일 개들 생각만 했다. 개들은 다행히 조카가 봐줬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남겨진 개들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낫자. 내가 죽으면 우리 개들 그대로 보호소 행이다. 그러니 기운 차리자 했다.


그러면서 개 두 마리를 길러도 아프니 마음이 이리 고단한데 고만 고만한 애를 두고 아픈 다른 사람들은 어쩌나 싶어 절로 기도가 나왔다. 세례를 받은 후 병원에 있는 동안 남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한 것 같다. 한 병실에 있는 앳된 엄마들을 보면 마음이 미어자는 것 같았다.


언제 한 번은 포천에 혼자 있다 쓰러져 구급차를 타기도 했는데 그때 나를 싣고 가려고 온 구급대원을 보고 철없는 사람 좋아하는 해탈이가 좋다고 꼬리 치며 달려들었다. 경계심이 강한 복주는 이들을 보고 컹컹 짖었다. 아픈 와중에도 그 상황이 어찌나 죄송하고 괴롭던지. 얼추 상황이 수습되고 차에 오르니 젊은 구급대원이 내게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개들을 방안에 넣지는 못했지만 다른 데로 못 가게 대문은 잠갔다고 했다.  그때 그 청년의 눈동자가 얼마나 선 하던지. 평소 같으면 모르고 지나갈 마음인데 병원으로 가는 내내 속으로 청년에게 진심을 다해 고마워했다.


다행히도 이제 더는 아프지 않다. 대학병원 의사는 내게 몸속에 있는 죽은 피를 다 뺀 게 아니라 언제 다시 쓰러질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치부터 배꼽아래까지 배를 갈라 장기를 전부 꺼내 씻고 도로 넣자고 했다. 수술은 산부인과 대장내과 협진으로 이루어질 거라 했다. 큰 수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수술을 받지 않았다. 오래 고민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의사에게 한 번 더 쓰러지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의사는 내 결정을 아쉬워했다.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났지만 요즘의 나는 다행히 더는 아프지 않다.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염증수치를 체크하는데 정상 수준이다. 감사할 일이다.


앓아눕기 전에 평소 친하게 지내는 편집자를 통해 오마이뉴스 연재 담당 기자를 소개받아 연재를 시작했다. 때 마침 그 친구도 개를 키운다는 얘기에 반색하며 개에 대해 써 보자 의기 투합했다. 하지만 연재를 시작하고 병에 시달려 사흘들이로 입원을 하지 않나 모르는 개한테 양손을 물어 뜯기는 둥 사건사고가 이어져 마감도 제대로 못하고 연재도 중단 됐다. 하지만 이 기회를 통해 글 쓰기에 재미를 느꼈다. 전에 썼던 글은 등 떠밀려 쓰는 것 같았는데 이번엔 달랐다.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개’ 얘기를 원 없이 할 수 있어 그런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녀석들을 구한 건지 녀석들이 나를 살린 건지 모르겠다. 아마 우린 서로가 서로를 구한 게  맞는 것 같다. 글쎄 개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 이 친구들 아니었으면  병원에 실려갔을 때 다시 일어나고자 이 악물고 노력하지 않았을 거다. 또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돈도 안 되고 힘만 드는 이딴 글쓰기도 때려치웠을 거다. 그러니 어쩌면 우린 서로가 서로를 절묘한 시기에 만나 살린 건지 모른다.

개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전에 개가 없던 시절의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이전의 일이 전부 전생처럼 아득하다. 개를 키우기 전엔 문화생활도 하고 철철이 여행도 가며 자유로운 비혼 여성의 삶을 마음껏 누렸는데 이제 그런 거 없다. 함께 자고 함께 먹는 개 가족이 있으니 이전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를 극장에서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들과 어울려 사는 지금이 혼자 살 때 보다 하루 중 느끼는 행복의 빈도와 강도 모두 월등하게 높다. 그러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개와 함께 있는 게 이렇게나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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