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aust Lucas Sep 6. 2024
첫 풋사랑 이야기
나의 첫사랑 이야기
사랑 없이 사는 것은 그저 숨만 쉬며 생존하는 것이다. 메마르고 굳어버린 감정은 가뭄에 갈라진 거북이 등 같은 논이라 할까?
이런 아픔에 비는 안 오고 기름을 붓는 일이 생겼다. 아는 동생으로부터 문자 하나가 왔다. '힘들게 살아온 50년 중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뭐 좋은 일이 있나 싶었지만 쫓기는 일상 때문에 궁금함을 묻지 않고 '좋겠네'라는 간단한 답만을 했다.
다음 날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밝은 목소리로 영상 전화가 또 왔다. '갑자기 뭔 영상이야?' 하는 약간 짜증 나는 마음으로 받아보니 한 여성과 함께 보였다. 그의 첫사랑을 만난 것이라고 한다. 며칠 후에는 안 하던 짓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ㅇㅇ을 만난 지도 한 달이 되어 간다. 평생 가슴속에 있었던 여자, 3일 전에 보고 오늘 또 만나러 가는데도 설레는 마음은 희한하다.
나이 50을 바라보면서 순대, 떡볶이, 김밥을 먹는 모습도 예쁘다. 아니하는 짓이 다 예쁘다.
얼굴을 만지고 안아도 보고 손을 잡아도 가슴이 뛴다. 이 나이에는 말투나 행동을 보면 다 보인다. 사랑이 내만 아프게 하면 되는데... 내 사랑하는 ㅇㅇ이도 아파 보인다. 내 사랑이 아프면 안 되는데 걱정이다.
우리 사랑은 슬픈 사랑인 것 같다. 인터넷 찾아봐도 이런 사랑 못 본 것 같다. 내 눈에는 정말 20대 보다 이뻐 보인다. 비싼 옷도 아닌데 뭘 입어도 품위가 있어 보인다.
나를 살 수 있게 해 줘서 고맙고 해 줄 게 없어서 미안하네.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히 사랑할 거다. 아프지 말고 세상이 힘들게 해도 널 지켜주고 내 남은 인생 널 위해 살 거다.'
이런 글도 보냈다. 아마도 일기 형식으로 혼자 메모했던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통화해 보니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고 싶더란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할 수는 없고 해서 내게 보냈다는 것이다.
그 메말라 보이던 영혼이 이런 감성도 있었나 깜짝 놀랐다. 누구라도 첫사랑 앞에서는 세월을 거꾸로 먹는 듯하다. 심지어 50대 중년마저도 20대로 되돌리는 마술을 부리기도 하는 것 같다.
'혹시 만나고 나서 배, 가슴, 머리 중 어디가 아프더냐?'라고 물으니 '그런 거 없고 좋기만 하다.'라고 한다.
부럽다. 그 부러움이 비가 올 때면 더 진해진다. 마치 갈라진 논바닥에 비가 오듯이 남의 첫사랑 이야기에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첫사랑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실 많이 보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바쁘게 살아왔지만 잊히지 않았다. 지금도 보고 싶다. 살아있는지 궁금하다. 페이스북, 카카오 스토리 등 온갖 SNS를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이름, 그 모습만은 뇌리에 뚜렷하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을 수 있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뭘 하다가 이제 와서 그리워하는지!
기억 속의 그 아이는 요즘 들어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하게 자주 나타난다. 살아 있다면 그 아이도 오십 대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결혼을 했다면 누군가의 아내, 다 커버린 젊은이의 엄마일 것이다. 서로 다른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어떨까? 그녀도 나와 같을까?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만남에 대한 갈증도 더해 간다.
딸아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가끔 그 아이와 오버랲된다. 우리가 서울, 부산으로 떨어져 아파할 때도 1학년이었다. 사관학교에 들어가 꽉짜인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힘이 되어 준 것도 그 아이가 1학년 때였다.
그때는 그 아이와의 추억과 미래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넘기었다. 그때는 오늘이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선배로부터 얼차려를 받거나 힘든 군사훈련, 체력단련으로 힘들 때도 그 아이와의 설레던 추억을 되새기고 다시 만날 날까지 며칠 남았는지, 만나서 무엇을 할 건지를 생각하며 버텨냈다.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보고 둘 다 합격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식사 후 만나서 밤늦게까지 같이했다. 조조 영화를 보기도 했고 겨울 백사장을 걸으며 밀려오는 파도와 장난도 쳤다.
용두산 공원 탑 아래서 손가락을 걸며 사랑을 약속하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같이 쓰려고 가져갔던 것을 숨기기도 했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비를 안 맞게 한다는 핑계로 겉옷을 벗어 감싸며 안아 보기도 했다.
88년 크리스마스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특별한 날이니 집 앞까지 데려다준다며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들어가려는 것을 잡아 아직 귀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이야기 좀 하자며 계단으로 가서 첫 키스를 했다. 깜짝 놀라 주저앉아버린 그녀를 겨우 일으켜 세우며 느꼈던 놀란 두 가슴의 쿵쿵거림이 아직도 선명하다.
서울ㅡ부산이라는 물리적 거리는 우리를 더욱 애타게 했던 것 같다. 오고 가는 수많은 손편지들은 꼭꼭 눌러쓴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친구들과 그 흔한 미팅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바닷가에 놀러 가서도 '파도를 보며 너를 떠올리고 수평선 맞닿은 곳이 마치 우리 둘을 갈라놓은 선처럼 보였어'라는 부분을 읽을 땐 미안하고 슬프기 그지없었다.
외박이나 휴가를 받아 부산에 갈 때면 부산역, 김해 공항에서 처음 맞아 주고 마지막까지 배웅해 주는 것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만날 때는 환한 웃음으로, 헤어질 때는 그 큰 눈 가득 눈물이 글썽이며 한가득 고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안아 주고 싶었지만 학교 규정을 지켜야 한다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참 어리섞었다.
언제인가는 역에서 나오는데 그 아이와 똑 닮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순간 걸음을 주춤하고 멈추었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사람과 부딪히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 아이의 딸일까?' 스쳐지나 돌아서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니지만 혹 그 딸이 엄마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 이후로 부산에 갈 때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웃기도 하고 허망한 기대도 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결과야 언제나 똑같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그 시절로 돌아 간 듯 한 기분이 든다.
첫사랑이란 참 알 수 없는 말이다. 단어 자체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거의 30년이 지났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애절하다. 그 아이와의 많은 부분이 지금은 비록 기억도 잘 나지 않고 또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또 어떨 때는 그 아이를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렘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아이가 되었건 그 설렘이 되었건 살아서 한 번은 꼭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