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cas Sep 20. 2024

비와 사랑

고딩의 사랑

비와 소녀

소년은 버스에 오르며 저 멀리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녀를 보자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차창 밖으로 내리는 빗물은 소녀의 머리카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뒤 이어 오르는 사람들에 밀려 자의반 타의반 뒤로, 뒤로 그리고 또 뒤로 가 섰다. 머리 위 손잡이가 흔들리자 버스는 출발했다.

살짝 열린 창 밖은 어두웠다. 저 어둠의 끝 너머는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둠의 먼 허공 하늘 뒤에는 반짝이는 별이 있으리라! 소년은 별을 좋아했다. 아직도 소년같은 그는 별을 보며 미래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는 걸 좋아했다.




그가 몸도 소년일 때 쯤 그 꿈을 같이 하고픈 소녀를 만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할까?' 궁금함을 여태까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또래 친구들은 그 첫사랑을 다시 찾은 경험담들을 술 잔을 기울이며 말하곤 한다.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그녀를 만났어. 너희도 알잖아! 내가 게 좋아했던거!'

'그래, 니가 진짜로 좋아했잖아'

'근데 요즘 머리 아프다'

와?

'얼마전에 이혼했는데 같이 살자하네. 사실은 그 때 지도 내 좋아했다고'

그도 안다. 지금 다시 만나봐야 결론은 아프다는 것이다.'같이 살자하면 머리 아프고, 잘못살면 가슴 아프고, 잘 살면 배가 아프다'

그래도 그는 수 많은 갈등 속에서도 죽기전에 한 번은 보고 싶어한다. 오늘 친구들을 만나 한 이야기의 핵심이다.

잠시 후 속도를 높이자 빗물에 씻겨 생그런 바람이 열린 차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시원했다. 무언가 좋은 향이 살짝이랄까 잠시 코끝을 스치는 순간 운전 기사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는지 버스가 움찔했다. 학원 수업 후 피곤했는지 손잡이를 놓친 소녀가 중심을 잃었다.

그 소년은 타고 난 순발력으로 지탱하며 버텼다. 아직도 소년임에 분명하다. '어머나' 하는 놀란 감탄사(?)가 소년의 귓볼을 쳤다. 찰나의 순간, 소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소년의 얼굴, 코 끝, 볼을 스치고 그 감탄사와 같이 지나간다.

손잡이를 놓친 소녀의 하얀손은 어느새 그 소년의 팔둑을 잡으며 넘어지지 않으려 의지한다. 발개진 볼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 연거퍼 고개를 숙인다. 머리결이 흔들릴 때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의 샴프향과 풋풋한 소녀의 체취가 전해졌다.

'발도 밟으셨는데요' 깜짝 놀라는 순간 또 한 번 차가 덜컹거린다. 빗길이라 그런가 보다. 사과하기 바빠 손잡이도 못잡은 소녀는 두손으로 소년을 안은 듯 앞으로 상체가 완전히 쏠려 버린다.
그 소년은 외친다. '기사 아저씨 한 번만 더 세게 브레이크요!' 물론 마음 속, 입속의 함성이 과연 누구에게 들릴까?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엄사친 그 소년에게는 꿈이 있었다. 언제나 두 눈은 빛을 발하며 어둠 속 불안을 모두 뚫고서 별에 닿았다. 어쩌면 저 어두운 밤의 허공을 가르고 소년의 눈동자에 닿은 별 빛이 두 눈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어둠을 거의 헤치고 나온 그에게 그 시절 아련한 기억속에 아린 이야기, 누구에게라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소녀가 지금도 가슴속에 살아 숨쉰다.

소년은 소녀가 다니는 학원 시간에 맞추어 과목을 선택했다. 수업이 끝나면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기다렸다. 소년은 기다리는 소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안다. 소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본적이 없다. 언제나 까까머리의 환하게 웃는, 반짝이는 눈 빛, 소녀를 향해 힘껏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리는 손만을 볼 수 있었다.

입구는 오가는 또래의 고등학생, 재수생들로 거의 한 시간 단위로 붐비고 혼잡했다. 하지만 소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올 때는 버스 승강장까지 비를 피해 같이 뛰었다. 소년의 책받침으로 소녀의 머리에 비 한방울 안떨어지게...차창 밖은 비가 주룩주룩...
나란히 선 둘 사이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년이 제아무리 비를 막으려 했어도 소녀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가녀린 하얀 손으로 조심 조심 머리카락에 달린 빗방울을 떨어내었다. 그 찰랑 거림은 향기로운 샴프 향과 함께 소녀만의 체취까지  둘 사이 공간을 적절히 채워고 또 약간은 소년에게 전해주었다.
  
비는 밤을 새어 계속 내릴 듯 쉬지 않았다. 버스 맨 뒷자리에는 재수생처럼 보이는 형, 누나가 서로 손을 잡아가며 팔도 주물러 주고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며 떠들고 있었다.

그 소년은 창에 비친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저들처럼...  그래도 재수하면서 저러는 건 아닌야! 얼른 대학생이 되면 나는 그녀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이 표현할 수 없는 향을 느낄거야' 라 다짐했다.

소녀는 오늘따라 소년이 이상했다. 창 밖만 보고 한 숨을 쉬는가 하면 고개를 돌려 두리번 거리는 게 이해가 안되었다. '애가 왜 이러지? 한 참을 창만 보질 않나? 주변을 두리번거릴 않나? 어디 아픈가? 숨을 가끔 끄게 쉬고...시험 성적이 안나온 것도 아닌데...'

이 생각 저 생각을 아무리 해봐도 평소 같지 않았다. 내리면 어디 아픈가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오늘따라 버스가 왜 이리 더디갈까? 비가 온다고 해도 너무 가다서다를 반복하네'

소년은 버스가 빗길에 위험하게 너무 빨리 가는 것을 느꼈다. 차도 막히고 앞도 잘 안보일건데... 평소에도 너무 과속한다고 느끼던 터였는데... 날씨나 기상을 전혀 고려안하는 기사 아저씨가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창에 비친 뒷자리를 힐끔 거릴라, 빗길임에도 과속하는 버스 기사를 노려 볼라,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 체취와 향을 하나도 남김없이 깊이 들이킬라 마음은 바빴다.

안절부절 못하며 크고 깊은 호흡을 계속하고 얼굴도 빨개지는 그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하고... 기분 나쁘냐 물어도 대답도 안한다. 뭔가 기분 나쁜 게 있나 보다. 혹 저번에 서울대 의대 다니는 사촌 오빠가 집에 다녀간 이야기할 때 표정이 안좋던데..  야가 삐졌나?' 내려서 물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집에 빨리 가서 모의고사 준비도 해야하는데... 요즘은 여자 남자가 어디있나? 이마에 손대보고 열이 많은지 알아보고 그때 오빠 이야기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비는 주룩주룩 계속 내렸다. 버스는 가다서다를 계속 반복했다. 어느  덧 벌써 둘은 다 같이 내릴 때가 된 것을 알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문세의 <소녀>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치 소년이 큰 용기내어 가끔 불러 주던 노래였다. 소녀는 가수와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소년이 불러주는 어설프게 정성들여 마음을 담아 불러주는 곡을 더 좋아했다. 깔깔거리며 소년의 노래를 얼마나 들었던지 이제는 나즈막히 본인도 모르게 따라 부른다.

소년의 귀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는다. 그의 심장 박동은 언제부터인가 소녀의 숨소리에 맞춰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마치 세네나데처럼, 낮게 깔리는 첼로 소리 같았다. 가끔 보이는 새하얀 이 사이로 나오는 노랫가사는 소년의 마음을 대신 노래해 주었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소녀는 지난 시험 기간 중에 엄마 몰래 소년과 통화 중의 일이 떠올렀다. <별이 빛나는 밤에> 노래 참 좋다는 말을 기억한 소년이 좋아하는 노래가 무어냐 물어었다. 이것을 기억한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어른들 깰라 조용히 조심히 이쁘게 정성들여 불러 주었다. 행복했다. 아직 손 한 번 잡지 않은 사이지만 드라마 속 연인들 흉내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