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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군단 #1

by Faust Lucas

1화
2035년의 태양이 멕시코의 어느 해변 마을에 느른하게 걸려 있었다. 김작가는 야외 카페의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손 안의 태블릿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 세상은 그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혼돈을 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그의 조국은 깊은 병에 신음하고 있었다. 끝 모를 저출산은 국가의 미래를 갉아먹었고, 감당할 수 없는 국가 부채는 500%를 돌파하며 모든 경제 지표를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한때 역동적이던 나라는 이제 노쇠하고 지친 거인처럼 휘청거렸다. 거리에는 생기가 사라졌고, 외국 자본은 헐값에 국가의 핵심 자산들을 집어삼켰다. 언론은 이를 '국제 투자 유치'라 포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명백한 경제 주권의 상실과 국민들의 무기력증이 깔려 있었다.
김작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때 이 나라의 문제를 펜으로 고쳐보려 했던 이상주의자였다. 국방의 최일선을 지키는 노병들, 이른바 '실버군단'에게 합당한 예우와 최첨단 장비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는 그의 소설 속에서나 빛을 발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제안은 코웃음거리조차 되지 못했고, '철없는 작가의 낭만' 정도로 치부되며 잊혔다. 시스템은 그의 목소리를 외면했고, 그는 스스로를 유배 보내듯 인터넷 노마드의 삶을 택했다. 물리적 국경을 넘어 디지털 정보의 파도를 따라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의 조국은 이제 뉴스 속 통계 숫자와 절망적인 헤드라인으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되었다. 현실의 고통은 멀리 떨어진 화면 속의 이미지로 흐릿해졌다.
그의 태블릿 화면 한쪽에서 영상 통화 알림이 떴다. 스티브였다. 본명은 김철수였지만, 그는 이미 전 세계에 '스티브'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용하는 거대 위성 통신망, '스타링크'의 실질적 설계자이자 차기 CEO로 불리는 사내. 김작가의 오랜 친구이자, 현실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김작가와는 정반대로 오직 미래와 효율만을 추구하는 사내였다. 그들은 각자의 시간대와 공간 속에서 디지털 연결망을 통해 깊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스티브는 언제나 데이터와 네트워크의 확장, 기술이 가져올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어이, 김작가! 또 네 나라 죽어가는 뉴스 보고 있냐?" 스티브는 항상처럼 피곤하지만 빛나는 눈으로 화면에 나타났다. 그의 뒤로는 쉴 새 없이 갱신되는 복잡한 데이터 스트림이 배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는 늘 수십, 수백 개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듯 보였다.
"보다시피. 네 위성들이 보내는 실시간 정보에 비하면 이건 새 발의 피겠지만. 네 눈에도 보이겠지, 내 조국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썩어가는지." 김작가는 픽 웃으며 들고 있던 맥주병을 흔들었다. 멕시코의 느른한 오후 햇살 아래서, 한국의 비극은 멀게만 느껴졌다.
스티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내 시스템에는 그냥 비효율적인 자원 분배와 통제 불능 상태로 인식될 뿐이야. 사회 시스템 전반의 노후화 지수도 높고. 뭐, 근데 그게 내 관심사는 아니고. 다음 주에 네덜란드에서 만나기로 한 건 잊지 않았지? 이번에 공개할 스타링크 새 기능, 네 소설에도 써먹을 만한 거 많을 거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스타링크의 확장과 기술의 진보에 있었다. 한 국가의 몰락은 그에게 있어 수많은 데이터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뉴스는 계속해서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을 생중계했다. 특히 김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실버군단'의 현실은 처참했다. 최전방 철책선 경계를 서는 노병들은 낡고 해진 파워슈트를 순번제로 돌려 입어야 했고, 제대로 된 보급은커녕 기본적인 의료 지원조차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방 예산은 줄고 줄어 최소한의 유지조차 버거워 보였다. 김작가가 상상했던 위풍당당한 '실버군단'은 없었다. 그저 국가의 마지막 짐짝처럼 취급받는, 지치고 병든 노인들이었다.
온라인 공간은 조롱과 자조로 가득했다. 특히 노인 세대와 국가 상황에 대한 비난이 뒤섞이며 과격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이럴 바에야 노인네들이 쿠데타라도 일으켜라!", "연금으로 총이나 사 들고 청와대로 쳐들어가라고!", "어차피 곧 죽을 건데 나라 한번 뒤집어보자고!"... 씁쓸한 농담들. 정보기관은 이런 발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나, 공식적인 보고서에서는 '고령층의 사회 불만 표출'이나 '일부 인터넷 어그로꾼들의 선동'으로 규정하고 심각한 수준의 안보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노인들의 와해된 조직력과 육체적 능력 저하를 근거로 들며 '심각성 낮음'으로 결론 내렸다.
김작가는 이 기사를 읽으며 씁쓸함을 넘어선 묘한 감정을 느꼈다. '쿠데타'. 그 단어는 자신이 오래전 묻어두었던 '실버군단'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했다. 비록 지금은 농담처럼 치부되고 있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개념의 그림자가 여전히 이 혼란스러운 현실에 남아있음을 감지했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비참하게 왜곡된 현실에 대한 씁쓸함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멀리 떨어진 관찰자였다. 멕시코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조국의 비극은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노인 쿠데타'라는 농담과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정보기관의 판단은, 김작가의 마음 한구석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무기력한 국가, 방치된 세대, 그리고 조롱처럼 던져지는 극단적인 발상. 이 모든 요소들이 그의 감지 능력 레이더에 미약하지만 분명한 신호로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은 더 이상 쇠락의 끝자락에서 비틀거리는 것을 넘어, 벼랑 끝에 서서 마지막 균형마저 잃어가는 듯했다. 만성적인 경제난과 사회 시스템 붕괴는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켰고, 정치권은 무능과 파벌 싸움 속에서 어떤 해법도 내놓지 못했다. 국민들의 불만과 절망은 하늘을 찔렀으나, 이를 바꿀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보였다. 모두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좀비처럼 무기력했다.
이런 극단의 상황 속에서, 무너진 국정을 수습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자, 혹은 절박한 도피처로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카드가 꺼내졌다. 국회에서 '북한과의 연방제 추진 및 표결'이라는 대대적인 발표가 이루어진 것이다. 정부 지도부는 '민족의 화합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강변했으나, 대다수의 국민은 이를 '나라를 통째로 넘기려는 매국 행위'라거나 '현 정부의 무능을 가리려는 도박'으로 받아들였다. 발표와 동시에 전국이 충격과 분노, 배신감에 휩싸였다.
이 소식은 특히 전방의 최일선을 지키는 '실버군단'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국경의 철책선 아래, 노병들은 낡고 해진 경계용 파워슈트 안에서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지급받은 슈트는 턱없이 부족하여 순번제로 돌려 입어야 했고, 잦은 고장에도 제대로 된 수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녹슬고 삐걱거리는 슈트는 그들의 지친 육신을 지탱해 주기는커녕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부족한 식량 배급, 열악한 주둔 환경, 끊이지 않는 잔병치레... 그들은 국가의 가장자리에서 그렇게 잊혀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관처럼 삐걱이는 슈트 안에서, 혹은 낡은 막사의 건빵 포대 위에서, 그들은 라디오나 낡은 단말기를 통해 연방제 표결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 혹한과 위험 속에서 지키고 있는 '나라'를, 저 위에서는 고작 정치적 계산과 무능을 가리려 통째로 넘기려 한다니. 착각이거나 오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뉴스들은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분노와 배신감이 낡은 슈트의 관절처럼 삐걱이며 노병들의 내면을 휩쓸었다. "우리가 뭘 지키겠다고 여기서 얼어 죽고 있었나!", "평생 나라를 위해 희생했는데 돌아온 게 이거냐!", "저것들이 기어이 나라를 팔아먹는구나!", "우리를 개돼지보다 못하게 여기는구나!" 욕설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심마저 뿌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킬 대상도, 믿을 이유도 찾기 어려워졌다. 수십 년간 지켜온 조국이,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다른 존재에게 넘어가려 한다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연방제 표결 발표는 전국적인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태극기 부대'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성향의 연방제 반대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격화되었다. '나라를 지키자', '매국노를 처단하자'는 구호가 난무했고, 시위대는 국회가 위치한 여의도를 향해 집결했다. 시위대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고, 경찰 병력과 충돌하며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 거리에는 분노와 불안, 그리고 파국을 향한 열기만이 가득했다. 국민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극명하게 나뉘어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국가 시스템의 붕괴는 이미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지고 있었다.
멕시코의 해변 마을에 앉아 있던 김작가는 이 모든 상황을 태블릿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연방제 표결 발표, 전국적인 충격과 분노, 그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대. 특히 전방의 실버군단 병사들이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에 대한 보도를 보며 그는 깊은 서늘함을 느꼈다. 그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과 국가의 마지막 도박. 과거 그가 '실버군단'이라는 이름을 상상했을 때 품었던 이상과, 현실의 비참한 노병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가해지는 마지막 모멸감. 이 모든 것이 뒤엉키며 거대한 폭발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뇌리에는 정보기관이 '심각성 낮음'으로 치부했던 '노인들의 쿠데타' 농담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씁쓸한 농담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그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될 수 있음을 소름 끼치게 시사했다. 절박한 정부, 분노한 국민, 그리고 배신감에 불타는 노병들. 이 모든 요소들이 뒤섞여 예측 불가능한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김작가는 더 이상 멀리 떨어진 관찰자로만 머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조국의 벼랑 끝 상황은 그의 평화로운 유목 생활을 위협하고 있었고, 그는 이 거대한 혼돈 속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 혹은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폭풍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폭풍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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