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 시간>을 읽고 나서

by 스밍


<희랍어 시간>을 다 읽고 덮은 뒤표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 여자의 기척과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덮을 때까지 행간 사이에서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니던, 모양 없던 무언가들이 '기척' 이었을까 생각했다. '기척'이라는 단어를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떠올려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꾸 생소해서 단어를 들춰보며 속발음을 했다. 도대체 기척은 무엇이며, 기척과 기척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고향의 기차역에 도착해 새벽 한 시께의 외곽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지금이 피크타임이라며 속도를 냈다. 그 바람에 도로 옆으로 줄지은 주황빛 등들이 하나로 뭉쳐 월식처럼 일렁거렸다. 갑자기 마음 한 구석도 물결치듯 울렁이기 시작했다. 고향에 왔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나는 기척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내 고향 도시의 기척들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기 직전부터 자꾸 자리를 고쳐 앉는 사람들과 묘하게 들뜬 분위기. 여태까지 오는 전화는 황급히 끊거나 객실을 나가 받던 사람들이 그쯤에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어어- 다 왔어-'라고 말하는 산만한 분위기.


역을 나서면 얇은 막이 깨지듯 미묘하게 달라지는 온도, 그리고 얼굴에 와닿는 뭉근하고 따뜻한 공기, 온갖 비상 깜박이로 번쩍이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차들, 혹시 자신을 보지 못할까봐 손으로 크게 호선을 그리며 잰걸음으로 차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집으로 향하는 차에서 마치 무중력처럼 떠다니고 있는 기분, 창문을 열고 크게 들이마셔 보는 고향의 냄새, 외곽 도로의 넘실거리는 가로등 빛.


집에 도착하면 끓은지 얼마 되지 않은 국 냄새, 평소 틀지 않던 내 방 보일러를 더 세게 틀어놓아 온기가 침대 매트리스를 뚫고 올라오는 기운. 방 책꽂이 한쪽에 있는 '윤리와 사상' 책을 보며 괜히 떠올려보는 수능날. 이제는 없어진 컴퓨터 자리를 보며 발끝이 오므라들곤 했던 새벽 몰컴의 스릴 넘치는 기분. 내 방을 기척으로 따지자면 낙천이다. 반드시 서울로 대학을 가고야 말겠다고, 서울에서 멋있는 사람으로 살겠다며 맹목적으로 가지던 희망의 기척. 열기구가 날기 전 주변 공기가 데워지는 것처럼 달뜬 기척.


이 기척들은 내가 내 고향을 사랑할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 준다. 무언가 잘못 된다고 해도 든든한 비빌 곳이 있다고. 수많은 기척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늘 언제나 안온할 수 있다고. 그렇게 서울로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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