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타고 부르고스까지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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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2일 차
2018. 5. 25. 금요일
비얌비스타(Villambistia) - 부르고스(Burgos)
아침에 일어나니 걷기 싫었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숙취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딘가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오늘은 걷기 싫었다. 분명 이 마음은 어제 냉장고 옆에서 본 에이포에 인쇄된 부르고스까지의 버스 시간표를 본 것에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걸으면 8~9시간이 걸리는 거리가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한 시간에 도착한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홀렸다. 그 시간표는 나만 본 게 아니었다. 어제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들 버스를 타고 싶은 눈치였다. 외국인 친구들은 자기들은 다 버스를 탈거라고 했다. 한국인들은 다소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뭐... 비도 오고... 하니... 버스도... 생각해 보려고...'하고 말이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나도, 보통 사람들이 숙소에서 출발하는 시간보다 이미 1~2시간쯤 지난 시간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준비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들 버스를 타고 싶은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먼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니 누워있던 친구들이 (이제 막 일어난 척을 하며) 하나 둘 인사를 했다. 눈에 바로 보이는 친구에게 물었다.
‘너 오늘 버스 타고 갈 거야?’
‘응, 당연하지.’
그 순간 여기저기 침대에서 자기들도 버스를 탈거라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탄다는데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버스를 타는 수밖에! 마침 밖에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겠다. 버스를 타라는 신의 계시였다.
느지막히 나와서 몇 발자국 걸으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게 벌써 꿉꿉했다. 원래 한국인 특성상 점프*를 하면 마음이 찝찝하다고 하던데 나는 왜이렇게 신나는지. 자꾸 배실배실 웃음이 나왔다. 오늘 걸었다면 등산화가 다 젖어 냄새가 났을 거다. 피곤한 몸으로 비에 젖은 옷도 빨아야 했을 거다. 으, 생각만 해도 힘들다. 그럴 바엔 버스로 가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점프 : 걷지 않고 마을과 마을 사이를 이동 수단으로 이동하는 것.
그런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숙소의 호스피탈로가 이쪽 지역의 버스는 시간표에 맞춰 오지 않는다고 해 15분 미리 나와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정해진 시간보다 5분을, 10분을, 15분을 더 기다렸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져만 가고 버스를 함께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꼼짝없이 이 늦은 시간(당시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에 출발해야 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걷기로 했으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 걸어야 하는 상황은 죽기보다 싫었다. 지금 걸어서 언제 어디에 어떻게 도착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까딱하면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비를 맞고 내내 걷다가 다음 날 아침, 다 마르지 않은 등산화에 발을 욱여넣고 길을 떠나야 할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꿉꿉한 기분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저 멀리서 빨간 버스 하나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때의 심정이란 마치 해리포터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포터가 친척 더즐리네 집에서 싸우고 나와 거리를 떠돌다 발견한 3층짜리 마법 나이트 버스를 마주했을 때와 같았을 것이다.
*5월 기준, 순례자들이 보통 숙소를 떠나는 시간은 새벽 6시에서 7시쯤이다. 8시에 나가는 경우는 늦은 경우에 속하고, 숙소에 따라 다르지만 체크아웃이 오전 08:00인 경우도 있다.
빨간 버스는 놀랍게도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순례자들로 이미 거의 만석이었다. 눈에 익은 얼굴도 몇 보였다. 그중에는 내게 ‘나는 절대 점프를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멋쩍은 얼굴로 코를 긁으며 인사를 하며 눈길을 나눴다. '야, 너두? 야, 나두!'
우리는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 탄 사람들처럼 모여앉아 재잘재잘 떠들며 부르고스로 향했다. 돌아보면 점프를 하고 있다는 일말의 죄책감을 없애려고 더 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비 맞으며 걷는 순례자들을 보며 우리가 아님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만약 우리가 걸었다면, 지금쯤 바에서 비 맞은 몸을 말리고 있을 텐데.’, ‘등산화가 젖어서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을 텐데’하며 ‘만약에’ 이야기를 열심히 하기도 했다.
갑자기 우철오빠가 조용해지더니 자기가 오랜만에 탈것을 타서 멀미가 나는 것 같다고 했다. 듣자마자 모두가 빵 터졌다. 하긴 정말 그럴 수도 있는게 순례길을 걷고 있는 지금은 내가 두 발로 온전히 선 다음부터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무언가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한 시간이었다. 무려 12일을 말이다! 차창으로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가 최근의 내가 보는 풍경의 속도와는 사뭇 달랐다. 오빠의 말처럼 정말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았다. 얼른 눈을 감고 잠에 들려고 했지만 갑자기 버스가 분주해졌다. 벌써 부르고스에 온 것이었다. 하루를 성실히 걸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을, 버스로 단 한 시간여만에.
심지어 우리가 내린 시간은 알베르게도 열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시간도 때울 겸 부르고스 대성당을 둘러보는데 이름에 '대'가 붙은 것처럼 성당은 아주 컸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버스를 타고 올 때까지는 신이 났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점프를 했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뭔가를 채우려는 사람처럼 성당을 천천히 걸었다. 한 번 둘러봤는데도 괜히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다들 성당에서 발을 끌며 한 시간 반을 머물렀다. 마치 오늘 채우지 못한 걸음 수를 성당에서 채우려는 듯.
부르고스는 도시고, 도시에는 무릇 '웍'이 있기 마련이다. '웍'은 중국사람들이 차린 뷔페식 식당을 한국 순례자들이 이르는 이름인데 중국식 볶음밥, 스시와 같은 중식과 일식이 있다. 순례길에서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몇 없는 기회이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도시에 가는 날을 소망하는 편이다.
나는 평소 다른 나라를 오래 여행해도 한국 음식을 꼭 먹어야만 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닌데 신기하게 순례길에서는 자꾸 찾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도 웍을 꼭 들러 밥을 먹고 싶었다. 구글 맵에 찾아보니 알베르게부터 웍까지 걸어서 30분, 왕복에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래도 쌀알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순 없지. 심지어 며칠 전부터 회가 먹고 싶던 터라 왕복하는 1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밥을 먹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는데 어쩐지 너무 큰 도시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부르고스는 생장에서 시작한 까미노 프랑스길 사람들이 만나는 두 번째 도시다. 로그로뇨는 79.57㎢의 면적에 약 15만 명의 인구(2018년 기준)가 살고 있다면 부르고스는 107.08㎢ 면적에 17만 명이 넘게 살고 있는 조금 더 크고 사람이 많은 도시다. 4차선이 넘는 도로가 있고, 가끔 경적을 빵빵 울리는 차들도 있고, 사람들의 걸음도 묘하게 빠르다. 순례길을 걸으며 지나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또 보는 작은 마을을 걷는 우리의 생활과는 달랐다. 거리를 채우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들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다는 사실이, 저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생소하게 와닿았다. 여기서는 모두 익명이라는 사실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누가 봐도 순례자 차림을 한 사람들이 지나갈 때도 쉽사리 인사를 나누기 어려웠다. 어제까지는 내 입에서 잘만 나오던 ‘Hola(안녕)’ 같은 인사말은 목 언저리께에서 얹혀 나오지 않았다. 인사를 할까 말까 입만 옴싹달싹한 순간들이 더러 있었다. 사람들은 도시에 온만큼 데카트론*이나 쇼핑몰을 둘러본다고 했다. 하지만 왁자지껄한 도시에 기가 빨린 나는 기력 보충이 필요했다. 유심칩만 얼른 구매하고 숙소 침대에 누워 도시에 놀란 가슴을 달랬다.
*데카트론 : 스포츠 물품 프랜차이즈 매장. 다양한 물건을 구비하고 있고 저렴한 물건도 많아 순례자들이 순례길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곳이다.
하루 온종일을 누워있다가 느적느적 도시의 밤을 즐기러 나왔다. 분명 낮까지는 '도시 무서워ㅠㅠ' 했었지만 밤에 나오니 그 생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 반짝거리는 조명, 술집에 가득 찬 사람들, 얼굴이 벌게진 채로 연거푸 짠을 하는 사람들, 호탕한 웃음소리... 나 이런 거 좋아했지 참. 콧구멍이 벌렁거리도록 신났다. 당장이라도 맥주를 목구멍에 꽂고 싶었지만 조금 늦게 나온 탓인지 술집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가게도, 저 가게도 만석이라는 이야기를 듣다, 드디어 'Casa Pancho'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가게에서 제일 먼저 시킨 건 부르고스에서 유명한 스페인 전통 음식 모르씨야(Morcilla)였다. 우리나라의 순대와 아주 흡사한데 식감과 맛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순대는 좀 더 폭신폭신 말랑말랑한 맛이라면 모르씨야는 겉바속촉에 가깝다. 삼삼한 맛이라 소금이나 초장, 막장 등을 찍어먹는 우리나라 순대와 달리 모르씨야는 요리 자체가 간이 되어 있어 짭조름하다. 약간 튀긴 간간한 순대의 맛이 난다. 맥주랑 마시면 완벽할 수밖에 없는 맛!
더군다나 오늘은 술을 여러 잔 마셔도 괜찮은 날이다. 내일은 걷지 않고 저번에 못 간 빌바오 미술관을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맥주를 먹고 나서 샹그리아도 여러 잔 시켜 위를 후끈하게 채웠다. 그렇게 한껏 기분이 좋아진 채로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