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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Sep 25. 2022

처음 만나는 민트맛 술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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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1일 차
2018. 5. 24. 목요일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 비얌비스타(Villambistia)



점심시간에 숙소에 도착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모두 끝내도 겨우 오후 세시. 맨날 바에 들러 술 마시며 느릿느릿 걷는 내게는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앞으로 놀 시간이 대략 9시간 정도 남아있는 거라니! 시간이 여유롭다는 말은 그만큼 마실 술도, 나눌 이야기도 많다는 거였다.


유난히 뜨거운 햇빛이 쬐는 날, 맥주를 참을 수는 없지. 맥주를 하나 더 주문하러 1층에 내려가니 호스피탈로가 나를 반겼다. 이곳 알베르게의 호스피탈로는 MBTI로 치면 EEEE 유형의 사람 같아 보였는데 상냥하고 밝고 쾌활하고 친절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맥주도 아주 인심 좋게 가득 따라주시고!


테라스로 나와 우철 오빠와 S 언니와 맥주를 마시는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이유와 우연으로 이곳에 도착했다고 했다. 둘 다 처음부터 여기에 머물 생각은 없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이 길은 정말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날 함께 출발해도 수많은 변수로 엇갈리고 만나는 길. 그렇기에 여기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이 소중하다.



이곳 San Roque 알베르게는 15유로에 숙박과 저녁이 포함되어있다. 우리 돈으로 2만 원 정도니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이다. 메뉴도 정말 알찼다. 빵과 파스타, 닭찜,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특히 저 닭찜의 소스와 와인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와인도 물론 무한제공!


여기서 다시 만난 조셉은 첫날에도 만난 친구인데 그때도 지금도 와인을 아주 콸콸 들이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와인을 들이붓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금방 빈 와인 병이 즐비했다. 역시 맛있는 음식에 와인을 멈출 수는 없지. 사람들은 소스를 박박 긁어먹으며 함께 짠했다. 각국의 언어로 짠, 오늘 기분이 좋았으니까 짠. 물집이 났으니까 짠. 느껴졌다. 오늘 알베르게에 모인 순례자들은 찐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밤 아홉 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하늘이 밝았다. 유럽에 도착한 지는 3주째지만 해가 늦게 지는 건 늘 기분 좋은 생경함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좀 더 즐길 겸, 배도 꺼트릴 겸 마을을 둘러보는데 표지판을 하나 발견했다. 


로그로뇨와 부르고스와의 거리가 적혀있는 메뉴판. 신기한 건 로그로뇨에서 있었던 날이 엄청 예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72km가 떨어져 있었다. 내가 하루에 25km 이상을 보통 걷는 편이니 3일 정도 지난 셈이다. 하루가 밀도 있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생애에서 이렇게 밀도 높은 하루를 산적이 없었다. 수능을 준비하던 고3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렇게 밀도 높은 하루들로 세상을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까미노의 끝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순례자 친구들은 2차를 시작하고 있었다. 맥주를, 샷을 먹으며 테라스에서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얼른 가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들이 북적대니 호스피탈로도 나와 우리와 함께했다. 그리고는 맛있는 민트 술이 있다며 우리 모두에게 잔을 나눠주었다. (술 나눠주는 사람 좋은 사람)


한 잔 마셔보니 민트향이 확 났다. 그리고 미치도록 깔끔했다. 입안이 화한 그런 느낌보다는 담백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향은 핸드릭스 진과 베르무트와 민트가 조화로운 향이었다. 특히 민트 향은 합성착향료의 인공적인 향이 아닌 민트 고유의 은은한 향이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술맛이 나는 맛있는 술. 사람 입맛은 다 똑같다고 먹어보는 사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 술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호스피탈로는 두 개 술을 자기만의 레시피로 섞었다며 술병을 꺼내 보여주었다. 술병을 꺼내니 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술판이 벌어졌다.



역시 아까의 촉이 맞았다.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내일 다들 걸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스페인 친구들은 내게 열심히 스페인어의 ‘rr’ 발음을 알려주고, 호스피탈로는 우철 오빠가 ‘bonito(멋진, 귀여운)’ 사람이라고 해 깔깔 웃고, 민트 술을 계속 먹고 싶다고 폭주하는 내게 민트 술을 바에서 주문하는 법을 알려주고, 조셉은 취해서 헤롱헤롱 자러 갔다. 까미노를 걸으며 처음으로 많은 사람과 이렇게 오래 논 건 처음이었다. 제대로 짐 정리를 해놓지도 않았는데 잘 시간이 닥쳤다.


나, 내일 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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