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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1일 차
2018. 5. 24. 목요일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 비얌비스타(Villambistia)
절묘한 위치에 물집이 생기고야 말았다. 걸을 때 힘을 받는 발바닥 부분에 딱 생긴 것이다. 물집을 피하려 다른 부분으로 땅을 디뎌보기도 했지만 이십 년이 넘게 이 자세로 걸어온 관성은 무시하지 못했다. 자칫하다 자갈이라도 밟으면 소리도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까미노에 익숙해져 취침시간도 늦춰지고 있는 차였는데 어제는 평소보다 더 늦게 잠에 들었다. 한 마디로 컨디션이 개똥이었다.
까미노에서 다른 순례자들을 만나면 'Hola'하고 크게 인사를 전하곤 했었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다른 순례자들 눈에도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눈도 반쯤 감긴 상태로 느리게 걷는 나를, 사람들은 그냥 지나쳐 가지 않고 꼭 멈춰서 안위를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배고픈지, 걸을 수 있는지, 택시를 타야 하는 건 아닌지 아주 세심하게도 말이다. 이런 관심이 부담스럽다가도 왠지 좋았다.
'올라,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파?'라고 물으면
'응, 나 지금 발이 너무 아파' 하며 우는 소리도 곧잘 했다.
오늘 제일 많이 한 말은 'Estoy cansada(피곤해)‘였다. 산티아고에 오기 전, 급하게 시원스쿨 스페인어 인강을 벼락치기하며 ‘cansadar’를 배웠는데 여기서 뭐라도 써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집을 피해 용을 쓰다 보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안정적이지 않은 보행 자세로 자꾸 걸으니 다른 곳에도 물집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한 거다. 하나의 물집을 잡으려다 괜히 판만 키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 물집들이 아주 옹골차게 자리를 잡은 거다. 더 이상 걷기는 무리였다. 그때 꼼피드(Compeed) 자판기를 발견했다. 마침내.
산티아고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들이라면 Compeed라는 브랜드에 친숙할 것이다. Compeed는 물집이 있는 부위를 덮을 수 있는 반창고인데 보통은 약국에서 많이 판다. 반창고가 어느 정도 부피가 있기 때문에 물집에 있는 부위에 부착하면 통증이 확연히 줄어든다. 그래서 순례자들의 원픽이다. 나는 이미 가지고 있던 꼼피드를 다 사용한 상태였고, 다음 마을에서 약국을 찾을 때까지는 죽은 목숨이었는데 흙먼지 가득한 한 작은 마을 어귀에서 자판기를 발견한 것이다. 꼼피드는 못 참치. 당장 벤치를 찾아 발을 말리고 꼼피드를 붙였다.
당장 출발할 수 있는 발의 상태가 아니라 쉬고 있는데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내 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 발 물집을 보는 것에 끝나지 않고, 내 물집이 있는 꼼피드를 만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 발인데 저 사람들은 더럽지도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렇게 여러 명이 내 물집을 보고, 만지고, 행운을 빌어주는 수치스러운 시간들을 보냈다. 이것도 곧 익숙해져서 지나가는 사람이 내게 뭐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발을 들어 보이며 물집을 가리켰다. 그러면 굳이 멈춰서 등산화를 벗고, 양말을 벗으며 자기들의 물집도 함께 보여줬다. 서로 발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물집을 보여주는 여기는 까미노.
오늘은 적어도 20km는 걸을 생각이었다. 최근에 산티아고순례길을 다녀온 고운언니가 좋은 알베르게가 있다며 비얌비스타(Villambistia)의 한 알베르게를 추천해 주었는데, 이 알베르게에 머물 생각이 없어서 구글 맵에 저장만 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발이 점점 심각하게 아파옴에 따라 비얌비스타까지만 걷기로 결정했다. 결정하는 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발이 아프면 그냥 쉬면 될 것인데 괜히 여기서 멈추는 게 떳떳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하루 종일 오늘 어디까지 갈까 생각했던 히스토리도 있었다. 출발 할 때부터 이미 마음에서부터 내가 한계를 규정지은 느낌이었다.
종종 점프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점프는 두 발이 아닌 택시나 버스 등의 이동수단을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한국인들의 경우 이 점프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상당하다. 창피한 일로 여기거나 점프를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외국인들의 경우는 또 다른데, 어느 정도의 마음의 부채감은 가지고 있지만 그걸 부끄러운 일로는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미할과 함께 만난 브라질 친구와 점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사람마다 각자의 까미노가 있는 거라고, 자신의 몸상태를 잘 체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나 역시 누군가가 점프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그 친구의 답변을 빌어 이야기 해주곤 했다. 그러면서 정작 나는 마음속에서부터 그러지 못한다. 모순적이다.
여러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벌써 비얌비스타에 도착했다. 조금은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알베르게의 리셉션에 앉아있는데 호스피탈로가 시원한 물 한 잔을 줬다. 언뜻 보니 술도 시킬 수 있는 것 같아 맥주도 한 잔 시켰다. 그렇게 앉아서 더위를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인영이 지나갔다. 저번에 로그로뇨에서 만난 우철 오빠였다. 그러더니 루트가 달라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S 언니도 들어왔다. 내 발을 마구 만지던 부부도 들어오고, 첫날에 만났던 조셉도 들어왔다. 그야말로 만남의 광장이었다.
갑자기 여기로 온 게 좋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