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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Aug 28. 2022

우리는 모두 너를 신경 쓰고 있어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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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0일 차
2018. 5. 23. 수요일
나헤라(Najera) -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비가 내리는 모양새를 보니 쉽게 그치지 않을 터였다.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10km를 더 걷냐며 걱정했지만 별도리가 있나 그냥 걸을 수밖에! 그새 언니가 머물 마을에 도착해 언니와 헤어지고 묵묵히 걷고 있는데 비를 맞고, 맞고, 또 맞고 있다 보니 또 어이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비를 챙기지 않고 짐을 다음 숙소까지 보내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근데 오늘 아침을 돌이켜 보면..


오늘 일기예보를 확인했나요? NO...

우비를 챙길지 말지 고민이라도 했나요? NO...


그냥 내가 문제였다. 40km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에 얽매여 짐을 줄일 생각만 했다. 아니 그래도 조금 억울한 게, 산티아고로 오기 전 한국에서 산티아고 여행기를 많이 읽었는데 5월에 출발한 사람들의 글에서 ‘비'에 관한 이야기는 잘 없었다. 태양 때문에 걷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만 차고 넘쳤지 비가 이렇게 자주 왔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괜히 비싸고 무거운 우비를 들고 온 거 같다는 푸념도 봤다. 하지만 나는 첫날부터 비를 자꾸 만났다. 오늘이 10일 차인데 벌써 세 번이 넘게 비가 왔으니까.



오늘 비는 전보다 더 심했다. 그전까지는 주루루룩 정도로 오는 정도였다면 오늘은 파바바바바박 내렸다. 챙이 넓은 모자가 다행히 눈으로 비가 들이치는 걸 막아주었지만 머리 통에 강한 빗줄기가 꽂혔다. 아팠다. 비로 습해진 날씨 때문에 추위를 막으려 입은 얇은 재킷은 금방 꿉꿉해졌다. 벗으면 너무 춥고, 입으면 찝찝했다. 길은 금세 흙탕물이 됐다. 등산화 안으로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신발이 더 축축 쳐졌다. 문득 카카오 택시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기는 허허벌판. 한국도 아니었다. 혹시나 버스나 차가 지나가면 타볼까 했지만, 결국 도착할 때까지 어떤 차도 보지 못했다.




오늘 머무는 숙소는 저녁을 함께 먹고 순례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약한 곳이다. 젖은 옷가지를 빨래하고 식사 시간에 간신히 맞춰 식탁에 앉았다. 식탁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다섯 명 남짓 앉아있었다. 푸엔테에서 마주쳤던 울리케와 티나도 있었다. 우리는 빠에야와 샐러드, 와인을 나눠마시며 오늘을 이야기했다.


문득 ‘오늘’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게 생경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는 잘하지 않던 이야기 주제였지만 여기서는 누구나 오늘과 지금을 입에 올렸다. 어떤 사람들은 ‘오글거린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주, 깊게 말이다. 다시 볼 수도, 못 볼 수도 있는 사이다 보니 주변에 하기 어려운 엉뚱한 이야기도 술술 나왔다.



이제서야 내 생각의 궤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오롯이 혼자가 되는 순간들이 멋쩍게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난 괜히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카톡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핸드폰을 잡는 빈도가 확연히 떨어지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뒤적거리기보다는 멈춰 서서 풍경을 돌아보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보다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와 걸을 때 옷이 스치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차츰 이 길에 집중하고 있었다.


식탁에 모여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전체 여정으로 치면 오늘은   분의  정도 지나온 셈인데, 10 정도의 기간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관성을 만든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아예 가방 안에 넣고, 걷는 동안엔 꺼내지 않는 사람도, 뭔가 기록하고 싶은 순간이 생기면 잠시 멈춰서 노트에 메모를 하는 습관를 들인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오늘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다들 내일위해 일찍 자리를 떴다.



나는 오늘 걸은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다이어리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저녁시간에 하마처럼 와인을 털어먹는 나를 위해 호스피탈로가  몫으로 남겨준 와인도  병이  남아있었다. 와인을 친구 삼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울리케가 거실로 나왔다. 혼자 나와있는 내가 마음이 쓰여 나왔다고 했다. 울리케는 걷고 있는  마음이 괜찮은지, 혹시 몸이 아프지는 않은지 살뜰하게 나를 챙겼다. 타지에서 받는 목적 없는 친절에 눈이 시큰했다. 나는 울리케에게 이렇게 나를 신경 써줘서 감동했다고 전했다. 울리케는 말했다.


이 길에 있는 우리 모두는 너를 신경 쓰고 있어.”


되게 뻔하게 들릴 수 있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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