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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10일 차
2018. 5. 23. 수요일
나헤라(Najera) -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나 혼자 밖에 없어보이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너무 반가워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는데 마침 딱 우리 엄마, 아빠 정도의 나이셨다. 자녀분들의 나이도 나와 비슷해 더 정이 갔다. 두 분 다 너무 인상도 성격도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훨씬 어린 내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주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 존댓말을 하셨다. 부부에게 사랑과 존중이 눈에 보였다. 그렇기에 쉽지 않은 이 길을 부부가 함께 걸을 수 있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양옆으로 넓은 들판만 펼쳐져있었다. 원래는 평지도 나왔다 산도 나왔다 지형의 고저가 보이곤 하는데 한참을 걸어도 계속 평지였다. 가끔 있는 노랗고 빨간 꽃들이 그나마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문득 날이 좋았다면 이 광경도 절경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조금 억울해져 이 이야기를 부부에게 전했더니 만약 나무 하나 없는 이 길을 몇 시간이고 걸었다면 지쳐버렸을 거라고 날 얼러주었다. 맞다. 진짜 날이 더웠다면 당장 이 길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거다.
원래 내가 하루를 걸을 땐 첫 한 시간 정도는 천천히 걷고, 그 다음에 속도가 붙으면 점심시간 전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는 편이다. 그리고 항상 점심시간을 오래 보내기 때문에 오후에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러다보니 쉬는 것에도 인색해지고, 빨리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곤 한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부부의 옆에서 천천히 걷고 싶었다. 부부는 괜히 자기들 때문에 천천히 걷는 게 아니냐고 몇 번이나 우려 섞인 질문을 했지만 난 이 속도로 걷는 게 좋았다.
우리는 적당한 구름과 시원한 바람 속에서 느리게 걸었다. 우리를 앞서는 사람들을 굳이 앞지르지 않고, 풍경을 보느라 늦장을 부렸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이렇게 광활한 들판을 걷는 건 앞으로도 없을 경험같았다. 그렇기에 들판마다의 초록의 다양함에 감탄하며, 풀잎이 바람에 이는 소리에 경탄하며, 뒤덮은 꽃에 감격하며 거닐었다.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 도착했다. 부부는 이곳에서 오늘 머무르신다고 했다. 40km를 걷는 건 너무 무리라며 계속 나를 말리셨지만, 이미 내 배낭은 동키* 서비스로 먼 숙소로 보내놓았던 터라 멈출 수 없었다. 부부를 보내고 다시 걷는데 S 언니가 곧 산토 도밍고 근처를 지날 거라는 카톡을 했다. 마침 산토 도밍고에서 밥을 먹을지, 좀 더 걷고나서 밥을 먹을지 고민이었는데 잘됐다. 까미노에서는 내일 보자고 인사했던 오늘 친구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꼭 S 언니 얼굴을 보고 가고 싶었다. 무려 내게 와인을 나눠준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아니던가.
구글맵을 키고 몇 개 음식점 핀을 눌러보니 평점이 괜찮은 곳이 있었다. 음식점 이름은 'La Parrilla de Arcaya'. 원래는 레스토랑인데 점심에는 몇 가지 간단한 음식만 파는듯 했다. 슬쩍보니 미트볼 같은 요리가 있었다. 미트볼이라니, 미트볼이라니! 보통 순례길 바르에서는 또르띠야(Tortilla)라고 하는 계란과 감자 등 채소를 사용한, 우리나라로 치면 술집에서 내어주는 안주용 계란말이 같은 음식이나, 보까디요(Bocadillo)라는 바게트 샌드위치를 주로 팔고 있어서 조금씩 입에 물리던 차였다. 그러기에 미트볼은 정말 특식이었다. 미트볼은 못참치.
*동키 : 순례길의 짐 옮김 서비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트볼과 감자, 그리고 여기에 맥주를 빠트릴 수는 없지! 꿀맛나는 맥주를 시키려고 하니 S 언니가 맥주를 달라고 할 때 '우나 세르베싸(Una cervasa)' 하는 것말고 맥주를 주문하는 다양한 방식을 배웠다고 했다. 먼저 작은 잔*에 한 잔 맥주를 달라고 할 때는 'caña' 라는 단어를 사용해 '우나 까냐, 뽀르 빠보르(Una caña, por favor), 더 큰 잔에(약 500ml) 맥주를 받고 싶다면 'jarra(하라)'를 써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나.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미리 알았으면 작은 잔을 여러 잔 시킬 필요도 없고 열심히 술을 더 마실 수 있었을 건데! 아주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바르 주인들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제가.. 정말 술을 한 잔만 하고 갈 사람처럼 보였나요?
*지역마다 용량이 다르다. 바스크, 빌바오 지방에서는 350~400ml, 보통은 200ml
밥을 먹고는 배도 꺼트릴 겸 닭 전설로 유명한 산토 도밍고 성당을 함께 둘러봤다. 산토 도밍고 성당은 신기한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순례길을 걷던 독일 출신 가족이 산토 도밍고의 숙소에 머물렀는데, 숙소 딸이 그 아들을 흠모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마음을 거절했고, 상처받은 딸은 아들에게 누명을 씌워 아들을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가족들은 슬픔을 뒤로 한채 순례를 마친 후, 다시 산토 도밍고로 돌아왔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아직도 교수대에 매달려 살아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가족들은 그 길로 재판관을 찾아가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막 닭고기를 먹으려던 차에 가족들을 마주한 재판관은 '네 아들이 살아있다면 지금 내 접시에 있는 닭고기가 살아 날아가겠구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순간 닭고기가 살아서 날아가 결국 아들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성당에는 닭과 관련한 내용이 쓰여진 안내판, 인형 등 정말 많은 닭들이 있었다. 누가봐도 순례자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다 멀뚱히 들어와서는 성당에 있는 닭만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지만 국가를 막론하고 닭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산티아고 가이드북엔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나보다.
성당을 나와서 슬슬 걷는데 언니는 그 다음 마을의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했다고 했다. 역시 오늘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언니가 그 마을의 알베르게에 머무른다면, 아마 우린 나중에도 동선이 겹치지 않을게 뻔했다. 언니가 머무르는 마을은 멀리서도 보이는 조금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성같이 생긴 건물도 있고 아주 웅장했다. 언니는 수도원에 마련된 알베르게에 머무는데 순례자들이 함께하는 저녁 커뮤니티 프로그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에서 머물기를 결정했다고 했다. 막 프로그램에 대해 이것저것 듣고 있는데 툭- 투툭 -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우비를 챙기지 않은 채로 짐을 다음 숙소로 보내버렸다.
그 말은 앞으로의 10km 정도, 약 두 시간 반 정도를 비를 쫄딱 맞으면서 걸어야 한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