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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Dec 26. 2021

순례길의 새벽

무서워용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24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https://brunch.co.kr/@2smming/117/


산티아고 순례길 10일 차
2018. 5. 23. 수요일
나헤라(Najera) - 빌로리아 데 리오하(Viloria de Rioja)




오늘은 40km를 걸어야 하는 날이다. 큰 이유는 없다. 이유라면 가끔 길에서 만나는 40-50km 걷는 놀라운 사람들이 궁금해서랄까. 하지만 평소 30km 내외를 걸어왔던 내가, 하루에 10km를 더 걷는다는 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한정되어 있는 체력과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든 가다듬어야 했다. 물을 넣으면 13kg가 훨씬 넘는 배낭이 먼저 고민이었다. 이걸 메고 40km를 걷는 건 무리처럼 보였다. 얼마 없는 도가니마저 갈릴 것 같아 배낭 동키*를 다음 숙소까지 예약해놓았다. 시간도 문제였다. 보통 1시간에 4km를 걷는다고 쳤을 때, 10시간을 꼬박 걸어야 했다. 말이 10시간이지 중간에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바에 들러 술 마시는 시간을 합치면 서둘러야 했다. 얼추 계산을 때려보니 늦어도 새벽 6시였다. 원래 일어나던 시간보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을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ㅠㅠ)


*동키 : 순례길 짐 옮김이 서비스. 거리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 


무음*으로 맞춰놓은 알람이 뚝- 하는 미세한 소리에 깼다. 삐걱거리는 2층 침대를 내려왔는데 다행히 나 때문에 깬 사람은 없어 보였다. 씻는 둥 마는 둥 하며 라운지에 나왔는데, 오늘따라 신발끈이 묶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신발끈과 씨름하고 나니 벌써 다섯 시 반이었다. 그동안 대여섯 명의 순례자들이 지나쳐갔는데, 새벽에 출발하는 사람이 몇 없어서 그런지 끈끈한 격려를 주고 떠났다. 한 친구는 발포 비타민을, 한 친구는 속삭이지만 가장 활기찬 응원을, 어떤 친구는 시리얼바를 주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점점 급해져 왔다. 등 하나 없는 깜깜한 길을 혼자 걷기가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제대로 신발끈을 묶지 않은 채로 누가 나가는 걸 엉거주춤 따라나섰다. 


*알베르게는 모두가 함께 쓰는 곳이라 알람을 따로 맞출 수 없다. 무음 알람이 전부인데, 무음이 시작되는 미세한 전기 소리를 캐치해야 한다.  


그런데 그 친구는 너무 빠르게 내 앞에서 사라져 갔다. 먼저 출발한 친구들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앞에는 어둠만 있었다. 길과 도랑을 판별하기 어려운 어둠이었다. 한국에서부터 고이 모셔온 헤드렌턴은 조도가 좋지 못했다. 얼마나 쓰겠어, 하며 가장 싼 옵션을 고르던 한국의 나를 잠시 원망했다. 감에 의지해서 최대한 바르게 걸었다. 이 와중에 친구들과 하던 '내 척추가 휘었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방법 - 발 앞에 선을 그어놓고 눈감고 오십 번 크게 제자리 걷기' 같은 것들이 생각났다. 항상 척추가 휘어있던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옆으로 빠질 게 틀림없었다. 자주 앞을 살피며 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찰박- 하며 물웅덩이를 밟았다. 


한 걸음마다 어둠이 감싸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내 걸음들은 어둠에서 빠져나오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았다. 기꺼이 어둠 안으로 향하는 걸음이 낯설었다. 가끔 뒤에서 사람 기척이 나면 두려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스쳤다. 하지만 그들 역시 빠른 걸음으로 'Hola' 하며 나를 지나쳐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어두운 생각을 지우는 것뿐이었다. 순례자들에게 전해 들었던 순례길의 좋지 않은 사건들, 한국에서 봤던 스릴러 드라마와 영화들, 그리고 <그것이 알고 싶다>. 하필이면 배낭을 동키* 보낸 터라 날카로운 것들도 내겐 없었다. 복어가 방어를 위해 자기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등산 스틱을 칼 삼아 앞뒤로 허공을 찔러댔다. 가끔은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척도 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새벽 출발을 홀로 하지 않으리 다짐했다. 


드디어 해가 뜨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길이 단숨에 밝아졌다. 몸을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해가 뜨는 하늘이 보였다. 그 순간 길에 흩뿌려 놓았던 후회들과 욕과 한바탕 쇼들이 무색해졌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구름과 하늘빛이 빠르게 변했는데 마치 불꽃놀이 같았다. 이 광경이 눈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 자꾸 몸을 돌려 뒤를 봤다. 그때,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다. 전에 뵈었던 한국인 프란체스코&프란체스카 부부였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스페인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프랑스 길/북쪽 길을 걸을 때는 보통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 걷는다. 




그나마 밝기를 올려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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