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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Dec 12. 2021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다시 혼자 걷기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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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9일 차
2018. 5. 22. 화요일
로그로뇨(Logroño) - 나헤라(Najera) 29.4km


 오늘부터 다시 걷는 날. 고작 하루 쉬었을 뿐인데 몸이 가볍다. 평소보다 한 발짝 한 발짝이 힘 있고, 가방도 뭔가 가벼워진 것 같다. 더 좋았던 건 걷는 풍경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좀 더 높아진 것이다. 하루 걷지 않았을 뿐인데 코끝을 치고 지나가는 풀냄새까지도 반가웠다. 기분이 좋은 난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일주일 걸었다고 금세 걷기 근육이 붙은 모양이었다. 드디어 일주일 만에 3시간을 배낭 지고 내리 걸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얻었다(+1)


 그런데 마음이 문제였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수지와 웅민이를 종종 마주쳤었다. 첫날부터 하루에 한 번은 얼굴 보며 걸었는데, 막상 오늘부터는 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이미 둘과는 하루가 벌어졌고, 빌바오 미술관을 내가 하루를 내서 간다고 하면 이틀이 멀어지는 거였다. 이럴 거면 그저께 좀 더 성대한 안녕 파티를 했어야 했나 후회스럽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 돌아가서는 만날 수 있겠지만 저녁에 알베르게에 모여 앉아 짠- 하는 시간은 없겠구나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원래는 누구와 함께 걷지 않을 생각이었다. 풀어내야 하는 생각들이 많았고, 한국에서는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생각 보따리에 차곡차곡 쌓아만 놓았던 것들이었다. 어쩌면 이 순례길을 걷는 게 나름의 도피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미뤄왔던 생각들을 이 순례길에서 다 해치워버리고 싶었다. 생각에 태그를 붙여 투두 리스트처럼 하나씩 지워나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온전하게 혼자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댈 여지조차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운명처럼 기차역에서부터 함께할 수 있는, 편한 사람들을 만났다. 걷는 길은 가끔은 같았고 가끔은 달랐다. 그래도 저녁에 알베르게에 함께 모여 지나온 오늘을 나누고 곧 올 내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면 고민들이 무색해졌다. 함께 하는 대화들은 '지금'과 '나'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오늘 내 컨디션은 어떤지, 나는 오늘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까지 걷고 싶은지만 이야기 해도 되었다. 걸으면서 돌아보니 모두가 배려였구나 싶었다.


 나헤라에 도착해 한국 아주머니 순례자분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하고, 같은 알베르게를 쓰는 다른 한국인 순례자와 함께 순례자 정식을 먹고 오긴 했지만 밤에 불을  알베르게의 적막이 외로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태까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덕분이었구나.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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