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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밍 Dec 05. 2021

술 나눠주는 사람 좋은 사람

무려 리오하 와인을 나눠주셨다!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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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8일 차
2018. 5. 21. 월요일
로그로뇨(Logroño)에서 하루 쉬는 날


술 나눠주는 사람 좋은 사람

라면을 먹고 알베르게 거실에 늘어져 있었는데, KTX를 타고 가면서 봐도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까미노에서 한국이나 일본(중국은 잘 없긴 하다)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하지만 같은 동아시아권이라고 언제나 마음이 기우는 건 사실이다. 늘 반갑고 도와주고 싶다고 해야 하나. 특히 이렇게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동양인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만나는 한국인은 더욱 그렇다. 사설 알베르게라 그런지 다 순례자가 아닌 서양인 여행자들만 체크인을 하고 있었다.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우린 '한국인이시죠?' 하며 말을 트고 금방 친해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 분이 갑자기 와인을 꺼내왔다. 멜론도 함께! 술과 음식을 나눠주는 사람은 내 기준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천사를 만날 줄이야. 이 길이 신성하긴 신성한가 보다.


S 언니는 선생님이었고, 학교 방학 기간을 이용해 까미노를 걷는다고 했다. (부러웠다) 우리는 언니의 학교 이야기부터 삶의 이유까지 주제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여행지에서는 유난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세우는 임계점이 낮아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의 통찰력은 가끔 오래 안 사람들의 그것보다 냉철할 때가 있어서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성향 같은게 나와 닮아 있다면 그렇게도 반가웠다. 이 길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한정성이, 이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을 때로는 조급하게 때로는 솔직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길 위에서 사람들은 친구가 되었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머리 위에 해가 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와인을 다 비운 우리는 저녁에도 만나기로 약속했다. 로그로뇨에 왔으니 타파스 바들을 뽀개기 위해서!



이틀 내내 타파스 바를 뽀갠다는 것은

말해 뭐해 신나는 거지! 어제 왔지만 로그로뇨와 사랑에 빠져 버린 난 오늘도 타파스 바를 뽀갤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영화에 보면 좋아하는 장면들이 있지 않나. (TMI지만)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영화의 Can't take my heart off you 노래가 나오는 부분과 <미드나잇 인 파리>의 오프닝 부분을 정말 좋아하는 데,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이 눈앞에서 아이맥스로 다시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로그로뇨의 타파스 바가 줄지어 있는 길거리의 초입의 풍경이 말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풍선이 되어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 사실 오늘 출발을 했어야 했나 가끔 걱정했는데 염려가 깡그리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오감을 열고 이 분위기와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어제 양송이 타파스를 10번 씹어 넘겼다면 오늘은 스무 번을 씹었다. 어제 와인을 꿀떡 넘겼다면 오늘은 코로 다섯 번 냄새를 마시고, 혀 뒤로 넘겨 풍미를 마시고,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겨 로그로뇨의 마지막을 알차게 보내려고 했다. 도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제는 유명한 곳 위주로만 갔다면 오늘은 신기한 곳, 처음 보는 곳, 가고 싶은 곳! 모두 가서 술을 마시고 타파스를 먹었다. 순례길인데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허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술을 먹기 위해서라는 걸! 앞으로 남은 날들 다 열심히 먹고 술도 마실거야. 그렇게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로그로뇨의 밤도 저물어 갔다.


술만 마시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긴 산티아고 순(술)례길


오늘도 빼놓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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