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 만에 라면을 영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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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8일 차
2018. 5. 21. 월요일
로그로뇨(Logroño)에서 하루 쉬는 날
기도합시다, 라-멘
이미 시간은 오전 9시가 넘어버려 순례길을 다시 떠나기에도 애매했다. 사실 갈 수는 있었지만 하루를 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미 신나 버렸는걸. 그리고 사설* 알베르게라고 침구도 폭신폭신했다. 조금만 더 늦잠을 자면 몸이 아주 달콤해질 것만 같은 기분. 순례길에서는 늦잠의 기준이 아침 7시 30분이라 남들의 기상 시간에 맞춰가기 버거운 차였다. 그래, 밀린 일기도 있고 사진 정리도 해야 하고.. 하며 얼른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사설 알베르게는 공립/국립 알베르게 보다 하루 숙박비가 조금 더 비싼 경향이 있으며, 꼭 순례자가 아니더라도 머물 수 있는 숙소다. 까미노 곳곳에는 시설이 좋아 유명한 사설 알베르게가 있고, 재정상 및 계획상 여유가 된다면 사설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순례자들도 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니 오후 1시가 되어 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위에서 꼬르륵 거리며 라면 생각이 났다. 아주 얼큰한 신라면. 해외로도 길게 여행을 종종 다니는 나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한국 음식을 찾아 먹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은 달랐다. 파리 여행을 포함해 2주 정도를 겨우 넘겼는데 벌써 라면이 먹고 싶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여긴 라면을 살 수 있는 중국인 마트가 있었다. 오늘 출발하지 않은 게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사러 털래털래 걸어가는데 배낭을 메지 않은 채로 자유롭게 느끼는 스페인의 낮 햇살은 그것대로 매력이 있었다. 마치 꾀를 부려 조퇴를 했던 고등학교의 어느 날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들 일상을 사는데 나만 뭔가 재미난 일을 하는 것만 하는 느낌.
돌아온 알베르게는 텅 비어 있었다. 다른 외국인들이 있다면 라면 냄새때문에 한참 기다렸을 뻔 했지만 시간도 완벽했다. 점심이라고는 오믈렛이나 샌드위치 밖에 없었는데 매운 국물이 있는 이런 완전식품을 먹을 수 있다니. 문제는 내 손이었다. 한국에서도 잘 끓여먹지 않는 라면을 이렇게 끓이게 될 줄이야. 한국에서 망쳤던 수많은 라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네이버 블로그의 현자님들과 내 뇌와, 내 손 힘줘! 다행히 결과는 대성공!
맥주와 함께 낮부터 라면을 먹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오늘 출발하지 않길 참 잘했어. 좋은 건 또 있었다. 바에서는 맥주 한두 잔을 먹으면 또 일어서서 걸어야 되는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맥주도 아주 넉넉하게 사 왔지. 남은 맥주들을 먹으며 드디어 생각 정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찍은 사진들과 메모만 휘갈겨 놓은 기록들. 그때는 충분히 시간을 들였다고 느꼈던 생각들도 다시 돌아보니 더 생각할 거리들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세네 시간을 들여 정리를 마쳤다.
빨간 머리 앤에서 나온 말 중 이 말을 좋아한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오늘도 그랬다. 빌바오 미술관을 가려했지만 결국 가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생긴 하루의 시간. 이 하루의 시간 동안 먹고 싶은 걸 먹고, 일주일 동안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정말 오늘 출발하지 않길 참 잘했어.
오히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