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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행복 일기 : 오월의 파리

특별편 : 여행에서 만났던 행복한 순간들

by 스밍




문토 - 김신지 작가님 '순간 수집 일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간 여행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삶은 언제나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다. 8년 동안 단 하나만 꿈꿔왔다고 해도 말이다. 한창 친구들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지만 난 지침이 고장 났다는 탓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조급한 마음이야 있었지만 안주하며 느끼는 안락함이 더 컸다. 그렇게 2년이었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성싶었다. 부윰하게 밝아오는 새벽에도 깨어있었던 어느 날, 약 2주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홀린 듯 끊었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내게 주는 마지막 방학 셈 치고.


파리 - 산티아고 순례길 - 포르토 - 리스본으로 이어지는 약 한 달 반의 여행이었다. 당연히 산티아고 순례길이 메인이었고, 파리는 저번 여행에서 아주 샅샅이 봤던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낮에는 발길 닿는 대로 소소하게 돌아다니다가 저녁에는 숙소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본격적으로 걷기도 전에 너무 많이 힘을 쓰면 안될거라는 생각도 있었고.


게다가 평소 등산도 하지 않던 난, 남은 2주를 거의 순례길을 걷기 위한 준비물을 사는 데에 모두 써버려 여행의 설렘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심지어 몇 개의 택배는 오지 않은 상태로 모든 짐을 캐리어와 50L 배낭 가방에 욱여넣고선 빠듯하게 비행기에 올랐다. 그래서 비행기에서도, 심지어 파리에 도착한 첫날까지도 내내 얼떨떨했다. 이곳은 한국인가 프랑스인가. 이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인가 파리 지하철인가. (이것도 급하게 구한) 한인 민박 침대에 누워 멀끔한 하얀 천장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곳은 나의 집인가 친구의 집인가 파리 1구의 게스트하우스인가.



5월의 파리

모든 염려는 다음날 현관문을 열자마자 무색해졌다. 정말 거짓말처럼 몇 걸음 내딛자마자부터 빈틈없이 행복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나는 빵 냄새와 여유로운 분위기, 길가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 심지어는 코끝을 건드리는 5월의 바람까지 사랑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여태까지 여행한 기간으로 따지면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던 터라 이번에도 내가 이렇게 좋아할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냥 다 좋았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평소에도 랜드마크는 잘 가지 않는 편인데, 이곳은 더더욱 어딘가를 둘러볼 필요가 없으니 한층 더 여유로워졌다. 지도도 보지 않은 채로 그냥 막 걷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 바게트를 샀다. 계획 없이 돌아다니고 식사 메뉴는 그때그때 가장 먹고 싶은 메뉴를 파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하루 반나절을 공원에서 보내거나 낮잠으로 보내기도 했다. 걷다가 생 샤펠(Saint-Chapelle) 성당이 있어 들어갔다가 한국에서부터 가져간 와인 코르크 따개를 빼앗겼고, 갑자기 어느 날은 개선문에서 해지는 에펠탑을 보고 싶어 올라가려다 새로 산 코르크 따개를 또 빼앗길 정도로 즉흥적이었다.

리빙 포인트: 파리의 관광명소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와인 코르크 마개, 맥가이버 칼은 숙소에 놓고 오자.



한 번 여행했던 곳을 다시 여행하는 건, 그 도시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빠르게 찾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미술관에 가서는 다 돌아보지 않고 저번에 좋았던 작품 딱 서너 개만 보고 나왔다. 그렇게 아낀 시간으로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갔다. 전에 여행할 때에는 일정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려야 해 정말 아쉬웠던, 심하게 애정하고 있는 곳들을 몇 번이고 다시 가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생각났던 곳들을 여유를 가지고 오늘도, 내일도 찬찬히 둘러볼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복이었다.


그렇게 5월의 파리를 매일매일 순도 높은 행복으로 채워가며 여행했다. 햇빛 한 결에 웃음이, 모든 들숨과 날숨에 기쁨이 오가는 나날이었다. 정말 행복에 절여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겨워했다. 평소 카카오톡 대화를 할 때 'ㅋㅋㅋ'을 많이 쓰는 편인데 파리에서는 'ㅎㅎㅎ'을 썼다. 광기 어린 사람처럼 ㅎ을 누를 때마다 ‘행복해’를 읊조리며 행복을 꽉꽉 눌러 담았다. 다녀간 곳을 다시 여행하는 건, 굳이 그곳을 좋아할 만한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아주 찰나에 그 여행지를 깊게 애정 하게 될 테니까.


여행 버킷리스트를 적어놓은 노트를 펴 작대기가 그어진, 다녀온 여행지들을 다시 보았다. 그러고는 아래에 다시 하나하나 옮겨 적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또 다른 행복으로 다가올 지나왔던 여행지들을 기대하면서.


파리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 파리 오페라 극장 천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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