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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어린 시절 - 감히 영알못따위가 주절주절

그냥 나의 생각/ 보여주지 않는 것에 관하여

by 이탈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정지하는 것과 같은 롱테이크 기법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노스탤지어"의 엔딩과 같이 극단적인 시간의 늘어짐을 표현하는 롱테이크 장면같이 말이다. 이는 분명히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리얼리즘 같지만 무언가 거리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는 그 지속으로서의 시간적 체험보다, 그 사회의 특징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제목과는 약간 다른 어린 소년 "이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반은 어린 시절이 없으며 어린 시절이 곧 현재이다. 허나 그 시기가 어린 시절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영화가 개봉되던 시기의 소련의 사람들이다. 스탈린 사후 60년대의 소련국민들은 전체주의 시각을 부정하기 시작했다.(서울대학교 러시아 연구소 - 스탈린체제와 소련사회ㅡ박수현)

그러한 시기 즈음에 나온 이 영화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또 현재의 어린아이들에게 어떠한 세상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볼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영화는 세계 2차 대전의 동부전선, 즉 독소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관객에게 그 실제를 보여주지 않음으로 인해 관객에게 "전쟁 중의 적"이라는 것 대한 존재가 절대적인 위협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기에 이는 액션도, 스릴러도 아니다. 분노할 수도 나아갈 수도 없기에 그저 이 상황에 대한 참담함을 느끼며 인물들 안에서 답답히 숨 쉰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그것이 비극이든 아니든 관객 자신의 삶과 연관 지으며 극을 즐길 수 있기도 하다. 이는 안전한 거리에 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이는 극 엔딩장면에서 보여주는 씁쓸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서 현재 24년도의 관객이 아닌 60년대 구소련 국민의 입장으로는 이것이 안전한 거리에 있지 않을 것 같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되지 않은 시간이기에 민간의 전쟁후유증은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극 중 아내를 잃고 폐허가 되어버린 집을 지키는 노인 같은 후유증 말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세상을 아이들에게 살게 할 것이냐는 메시지는 그 사회의 꽤큰 주류 담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이미지는 여러 불안과 인물들을 일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보여준다.
참호(죽음) 위에서의 키스(사랑)이라던가, 거기다 뾰족하고 불안 형태로 이반을 가리키는 나무판자의 이미지를 보면 키르히너의 작품과 같은 표현주의적 색채와도 비슷해 보인다. 그렇기에 관객에게 약간의 거리감과 우울을 즐기게 해주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보는 시점과는 다르게 비추는 카메라 때문인지, 그저 흑백영화의 색감과 시대상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앞서 말했든 롱테이크로 유명하다. "이반의 어린 시절"이후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현실감 있는 롱테이크에서 "솔라리스"로 넘어가며 비현실적인 롱테이크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끼되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내게는 약간은 모순되게도 느껴지지만)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허나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초반 영화 또한 사랑하기에, 그저 내가 느낀 것을 이렇게 주절대 본다.


+내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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