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는 쿽을 사용했는데...

by 이탤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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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디자이너?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을 때, 디자인팀에는 나보다 먼저 들어온 어린 선배 두 명이 있었다. 사수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그래도 나보다 자리를 먼저 잡은 사람들이라 자연스럽게 배울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고 들어온 신입 디자이너였다. 경력직이라고 부를 만한 경력도 없었다. 사실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디자인은 늘 어렵고 힘든 분야였다. 첫 사회생활로 들어갔던 작은 출판사에서 8개월 정도 버티고 나온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디자인 자체보다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도망치듯 나왔던 기억이 크다. 그래서 “앞으로는 디자인은 절대 안 해야지”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디자인팀 신입으로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S#2. 라떼는 말이야

첫날, 어린 선배들이 나에게 물었다.
“인디자인 할 줄 아세요?”


그 질문에 멍해졌다.
라떼는 말이야… 학교 다닐 때도, 그리고 출판사 다닐 때도 매킨토시에서 쿽익스프레스 3.3을 썼다. IBM(PC)에서는 페이지메이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인디자인?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순간 ‘나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몰려왔다.


선배들은 대답을 듣자마자 내 손에 책 한 권을 쥐여주었다.


인디자인 책.

“이거 2~3번 정독하세요.”


그게 전부였다. 따로 가르쳐주거나,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부터 책에 파묻혀 프로그램을 익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S#3. 쿽에서 인디자인으로

처음에는 정말 낯설었다. 메뉴도, 단축키도, 패널도. 하지만 차근차근 하다 보니 쿽을 써본 경험이 의외로 도움이 됐다. 인디자인의 많은 기능이 쿽에서 발전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개념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연결점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쉬웠던 건 아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익힌다는 건 늘 번거롭고, 한동안은 마우스 클릭 하나에도 긴장해야 했다. 그래도 계속 하다 보니 손에 익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인디자인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편해졌다.


S#4. 지금 돌아보면

돌이켜 보면, 인디자인 책을 끌어안고 몇 번이고 읽었던 그 시간이 내 경력의 전환점이 되었다. 쿽을 알았던 과거와 인디자인을 배운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지금은 둘 다 써본 경험이 내 강점이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살아남아야 하니까”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그 선택이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다. 그때는 버겁고 답답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오히려 고마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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