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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것이프로젝트 Jun 27. 2019

걷는 마음, 걷어내는 마음

[월간 이것이 6월호] 걷는 마음


요즘따라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세상이 온통 초록빛으로 빛나는 5월이다. 이 계절은 100년 전에도 이렇게 빛이 났을까. 어쩌면 그때는 하늘만큼은 더 맑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담고 있을까.


오랜 시간을 견뎌낸 물건을 마주할 때면 느껴지는 신비로움이 있다. 빈티지샵에서 우연히 찾아낸, 백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소품이나 오래된 수제 레이스를 만졌을 때, 용도를 알 수 없는 먼지 쌓인 물건을 시골 창고에서 발견했을 때처럼. 그럴 때면 항상 이 물건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지, 그곳은 어떤 곳이었을지, 이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궁금했다. 내가 이 물건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물건이 마주했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들도. 내가 아마도 경험하지 못할 단위의 시간이라서, 습관처럼 그 물건이 간직하고 있을 시간의 흐름을 상상 속으로 되돌리고, 걷어냈다.


연구소에 보존처리 일을 처음으로 배우러 갔을 때 내가 마주한 건 100년이 더 된 족자 형태의 그림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은 상태의. 언뜻 보기에 거무스름한 막이 빳빳하게 덧입혀진 것 같았다. 한지와 비단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보였지만 그것은 마치 미라같은 견고함이어서 잘못 쥐거나 실수로 잡아당기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듯 연약해보였다. 내가 그 날 해야 할 일은 그림을 세척하기 전, 족자를 분리하고 비단에 그려진 그림을 배접한 한지를 벗겨내는 일이었다.



족자의 나무(위의 나무를 천간, 아래의 나무를 지간이라고 불렀다)에 붙은 한지를 벗겨내려면 솜에 증류수를 묻혀 얼마간 불려낸 뒤 칼로 살살 벗겨내야 했다. 비단과 종이도 같은 방법으로 분리했다. 간단한 작업순서와 달리 예상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그림에 쌓인 시간의 흔적만을 걷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습관처럼 하던 상상을 현실화하는 일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작업을 하면서 그것은 +가 아니라 –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과거에서 미래로.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더해가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선 그 어느 것도 자유롭지 않은데. 유물만은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일,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을 걷어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일단은 시간을 한층씩 걷어내면 보이는 디테일이 주는 상상의 여지에 즐거웠다.


세밀한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 샌가 거의 빨려들어갈 듯 유물에 붙어서 작업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유물을 들여다보니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간, 지간에서 보이는, 누군가가 손으로 나무를 다듬은 흔적이라던지, 비단의 조직감에서 보이는 노동의 흔적,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각기 다른 안료의 질감과 누군가 정성스레 그려넣었을 무늬 같은 것들. 그 꼼꼼함에 감탄했고, 완성작에 담겨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나 나는 공산품에 익숙해져있는지에 대해서도. 100년 전의 세상은 내가 사용하는 주변의 물건들이 모두 누군가의 작품인 세상이었을까. 나의 삶이 수많은 타인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지금보다는 훨씬 명확했을 그런 시절엔 그릇 하나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구입한 사이트가 아닌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겠지.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나중에 알았지만 거무스름한 막은 족자 앞에서 태운 향과 초가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했다. 향과 초는 기도를 드릴 때 태우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거무스름한 막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빈 소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그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시간을 걷어내는 마음은 즐거운 마음이다.



쉽게 쉽게 살고 싶은 이것이의 친구,

김이지(Eas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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