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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Nov 24. 2019

위장 크림과 페르소나

군에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인생 편지 2/100

        우리는 모두 적당하게 위장하며 산다


아들에게.

오늘은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도 다소곳이 잠들었고, 숨죽이며 숨어 있던 파란 하늘도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밀었구나. 늦더위와 초가을이 뒤엉킨 하늘을 보며 기초 군사 훈련에 매진하고 있을 네 모습을 떠올린다. 오늘부터 첫 훈련 주간이라 아마 제식훈련을 받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혼자 똑바로 걷기도 가끔은 힘겨운 법인데, 처음 만나는 이들과 같은 호흡으로 발을 맞춰 걷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개개인의 실수가 쉽사리 드러날 수밖에 없는 군 생활의 특성은 너의 마음을 한시도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듯하구나. 그래서 어떤 이는 몸보다는 마음이 편한 군 생활을 추구하기도 한단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생각처럼 다채로운 게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돈, 명예, 정신의 안락함, 육체의 편안함 등 개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지구 상의 인구수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류가 수 만 년 역사를 통해 쌓아 온 좋다는 가치를 모두 등에 지고 사느라 실제 자신의 현생 삶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래서 또한 어떤 이는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을 테고.   

 아들아, 모든 삶의 순간에서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어떤 이는 생각하기를 귀찮아하고 피하려 들기도 해. 그러나 나는 네가 늘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지만, 단순하게 생각의 양만을 늘려놓는 건 아니란다. 또 다른 생각은 그 사람의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며 그 힘으로 그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다.  

 

 오늘 아빠는 너와 함께 위장 크림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구나. 너도 잘 알고 있듯이 입대 전에 개인적으로 준비한다는 소위 ‘사제’ 물건들이 있다. 그 물건 목록 중 상당수는 나라에서 지급하기 때문에 굳이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소위 ‘품질’이 더 좋다는 입소문 때문에 병사들 개개인이 구입하여 사용하는 물품이 바로 위장용 크림이다.    

오래전 군에 다녀온 세대들은 위장용 크림을 개인이 사서 사용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숯이나 심지어 구두약을 위장 크림 대신 사용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너처럼 오늘날 입대하는 세대들은 모든 게 부족하던 과거 세대가 아니야. 군인이기 이전에 장차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취준생이며, 남녀를 불문하고 비비크림에 익숙한 세대가 바로 너희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위장 크림을 얼굴에 바르는 단순한 칠감이 아닌 좋은 미용 재료로 생각하고 있어. 맞지? 그러니까 너희에게 위장 크림 대신 숯이나 구두약을 얼굴에 바르라고 하는 것은 총 대신 활을 쏘라는 것이고, 멀쩡한 전투식량을 두고 풀뿌리를 뽑아 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시대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져야 하는 법이니까.

   아빠가 위장용 크림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는 이유는 단지 달라진 너희 세대의 입대 풍속을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야. 너의 입대 며칠 전, 아빠는 네가 사놓은 위장 크림을 만지작거리다 불현듯 위장 크림이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의 페르소나(가면)와 비슷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갑자기 ‘페르소나’와 ‘융’을 끌어들이니 좀 당황스럽지? 아빠가 아는 한도 내에서 ‘페르소나’를 설명할 테니,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편지를 읽어 주기 바라.    

 융의 페르소나 개념을 알기 위해 먼저 ‘페르소나’의 어원을 소개하마. ‘페르소나’는 원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뜻해. 가면이라면 ‘가짜 얼굴’이라는 뜻이지. 즉, 배우가 무대 위에서 쓰는 가면은 극 중 인물을 표현하고자 하는 가짜 얼굴일 뿐 배우 자신의 진짜 모습은 아니야.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융은 ‘페르소나’를 한 사람의 인간이 그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외부로 드러내는 자신의 가짜 모습이라고 했단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 페르소나(가면)를 쓰고 살아간다고 했어. 쉬운 예를 더 들어볼까? 네가 집에서 엄마와 아빠를 만날 때는 아들로서의 너의 모습을 보일 테고, 대학에서 교수님과 만날 때에는 성실한 학생의 모습을 보일 테고,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실 때는 절친한 친구의 모습을 보이겠지. 어떤 때는 네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표정을 속여 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왜 페르소나를 쓰는 것일까? 너의 경험에 비추어 한 번 생각해 보렴. 융은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했을까? 융은 인간들이 페르소나를 쓰는 이유를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라고 했단다. 상갓집에서 슬픈 표정을 짓는 것, 잔칫집에서 흥겨운 표정을 짓는 것, 꾸중을 들을 때 반성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개그맨이 과장되게 웃는 것....... 이런 모든 가면의 이면에는 사회적 상황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의지가 숨어 있다는 뜻이지. 소위 ‘인싸’에 대한 열망은 ‘사회적인 자기 보호’라고 할 수 있겠구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니?    

이쯤 되면 아빠가 왜 위장 크림과 페르소나를 같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위장 크림은 원래 자신의 얼굴 모습을 변형하거나 숨겨서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사용돼. 특별히 군대에서 위장 크림을 사용하는 목적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거나 더 무섭게 보이도록 하며 상대방을 위협하기에 알맞은 모습으로 바꾸는 데 있어. 이때 본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어떤 모습은 과장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모습은 감추어지지. 바로 페르소나를 쓰는 거야.   

 이제 생각을 조금 더 넓혀서 군인으로서의 페르소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함으로써 남편과 아내로서의 페르소나를 써야 해. 마찬가지로 징병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군인이 된 너는 군복을 입고, 전투화를 신고, 얼굴에 위장 크림을 바름으로써 내적인 본래의 네 인격과 결별하고 ‘군인’이라는 외적 인격을 드러내야 하는 삶을 살게 돼. ‘군인’이라는 외적 인격을 자신의 모습으로 삼아 생활해야 하는 곳이 군대라는 조직인데, 군대는 네가 지금껏 겪었던 가정이나 학교와는 사뭇 다른 페르소나를 네게 요구할 거야. 때로는 강한 체력을, 때로는 끈질긴 인내력을, 또 어떤 때는 불굴의 용기를 요구하겠지. 그리고 지금 네가 있는 훈련소에서의 하루하루 일과들을 군인으로서의 페르소나를 갖추는 데 도움을 주는 과정이라고 여기면 딱 좋을 것 같구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군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용기’를 꼽았단다. 만약에 누군가 최고의 용기를 표현할 수 있는 가면을 만들었다면 플라톤은 아낌없이 그 가면을 사들였을 거야. 물론 가면을 만든 사람은 최고의 부자가 되었겠지. 이 얘기는 다음 편지에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아들아, 아빠는 오늘 편지를 통해 네가 융의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기를 바라.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않은 군 생활이겠지만 그 순간순간들에 숨겨진 찬란한 생각의 보석들을 네가 찾고 다듬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그 보석들은 네가 입는 옷과 신발에도, 얼굴에 바르는 크림에도, 함께하는 구호 속에도, 곁에 있는 전우들의 모습 하나하나 속에도 숨겨져 있어. 무심코 떨어진 사과가 어떤 이에게는 한 순간의 간식에 불과했지만 어떤 이에게는 우주에 작동하는 힘의 원리를 푸는 열쇠였음을 기억하렴.    

제식훈련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누군가와 함께 걷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네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거야. 오늘도 최선을 다한 네게 격려의 응원을 보내며 네 곁에 머물며 너와 함께 하루를 걸은 네 동기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보낸다. 지금 네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바로 네 곁의 동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2019년 00월 00일

...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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