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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Nov 22. 2019

평행우주론과 군 생활

군에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인생 편지 3/100

평행우주론과 군생활


"잠시 후 입소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훈련병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고 행사장 밖으로 물러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번, 세 번 울리는 입소식 사회자의 안내 방송에 주변 이곳저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지. 어떻게 이토록 건조한 안내 방송이 여러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아빠와 엄마의 마음은 깊은 심연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지. 이미 예정된 일이고, 불과 1~2분 전까지도 웃으며 너의 입대를 함께하고 있었지만 안내 방송 후 아빠는 전혀 다른 마음의 상태에 다다르게 되더구나. 아무 이유도 없이 눈이 떨렸고, 손이 떨렸고, 가슴은 두근대고, 너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렵게 널 보았을 때 아빠는 네 눈도 떨리고 있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래된 연인이 만나 어색함으로 어쩔 줄 모르는 그 상황과 똑 닮은 시간들이 그렇게 스쳐 지나갔어.

"건강하거라. 힘내!!"

뭔가 다른 멋진 말들을 늘여놓아야 할 것 같았는데, 순간 튀어나오는 말들이란 게 이렇게 무미하고 건조했었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 전에 일어났던 일이구나. 어색함과 안타까움으로 너를 보낸 후 우리는 훈련소 밖과 훈련소 안이라는  물리적 담장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었지. 어쩌면 사회와 군대라는 전혀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두 개의 우주로 나뉘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평행우주론이 떠오르는구나.

혹시 평행우주론이라는 말 들어 본 적 있니?

  

  평행우주론이란 수없이 많은 우주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론으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닌 하나의 가설이라는 점을 먼저 기억해 두자. 평행우주론은 최근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는 양자역학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어.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 양성자, 중성자 같은 양자들은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특정 장소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장소에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확률로서만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있어. 또한 얽힘 관계에 있는 두 양자는 하나의 성질이 결정됨과 동시에 다른 하나의 성질이 결정되는 놀라운 특성을 지니고 있어. 쉽게 말하면 양자들은 여기에 있음과 동시에 저기에도 존재할 수 있고, 0의 성질과 1의 성질을 중첩하여 지닐 수도 있어. 이런 양자들의 성질은 불확정성의 원리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고, 양자 컴퓨터 연구에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수많은 평행우주들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평행우주론자들은 양자적 존재 방식에 주목하고 있단다. 양자적 존재 방식에 따르면 이 우주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오로지 선택에 따른 가능성, 즉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거야. 어떤 양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양자는 0이나 1의 성질을 동시에 지닐 수 있어. 0으로 존재하거나 1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0일 수도 1일 수도 있는 50%의 확률로만 존재한다는 거야.  

이러한 평행우주론의 가설을 사람의 인생으로 확대하여 생각해 볼까? 사람도 인생을 살며 많은 선택을 하게 돼. 우리는 흔히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고 있잖니? 왜 달라질까? 평행우주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사람이 특정 선택을 할 때마다 선택한 경우의 수만큼 새로운 인생 경로가 생긴다고 볼 수 있어. 선택된 상황에 알맞은 새로운 우주가 펼쳐지고 그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 즉, 우리의 인생 앞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우주가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어떤 우주에서 살 것인가는 매 순간 개인의 선택에 의해 달라진다는 거야.

예를 들어, 배달 음식을 선택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너는 지금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짜장면을 먹겠다고 선택했다고 하자. 선택하는 순간 너는 짜장면을 먹는 우주적  삶을 살게 돼. 그래서 장차 입술을 닦을 때에도 휴지에 검은 춘장이 묻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겠지. 반대로 만약 네가 짬뽕을 선택했더라면 너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너의 휴지에는 붉은 짬뽕 국물이 묻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모든 가짓수의 인생이 각각 하나의 우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평행우주론의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구나. 이때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자신이 속한) 우주만을 보거나 듣고 경험할 수 있으며, 선택하지 않은 다른 우주적 상황은 경험할 수 없게 돼. 그렇다고 선택받지 않은 우주가 그대로 끝나는 것은 아니야. '나'라는 변수는 빠졌지만, 제 나름대로 네가 속한 우주와 평행하게 나아가게 된단다.


너도 아빠도, 우리는 누구나 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어. 네가 장차 너의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하는 문제도 지금은 다양한 가능성의 확률로 존재하고 있겠지. 그러나 우리 인생이 오로지 수학적 확률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란 무척 싱겁고 무미건조할 거야. 양자에게 '의지'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확실히 '의지'라는 게 있어서 선택의 순간에는 그 의지들이 작용하게 돼. 선택하는 순간만큼은 확률이 아닌 '의지'의 힘이 작용한다는 뜻이야. 

아빠는 과학자가 아니어서 평행우주론을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일 따위에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관심도 없단다. 다만, 양자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 새로운 우주가 펼쳐진다는 생각은 과학적인 증명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멋진 일이잖니? 크고 작은 선택에 따라 우리 앞에 새로운 삶의 우주가 펼쳐진다는 상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다시 네가 입대한 날이 떠오른다. 약식으로 치러진 입소식이 끝난 후, 너희들은 우렁찬 구호 소리만 남긴 채 훈련소 안쪽,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사라지더구나. 엄마와 아빠는 한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머물렀다. 그렇게 너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훈련소 담장 안에 남기로 했고, 우린 담장 밖 세상으로 걸어 나왔지. 그 후 오늘까지 우리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살며 서로 다른 이야깃거리를 쌓아왔단다. 그래서 그리움이라는 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겠지만, 평행우주의 의미를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너의 인생은 너의 선택으로 네가 살아갈 우주의 길로 통해 있고, 엄마와 아빠의 삶은 또 다른 선택을 통해 결국 너와는 다른 우주의 길로 통해 있을 테니까.

그러다 어딘가에 있을 우주정거장이나 삶의 인터체인지에서 가끔씩은 만나게 될 테니까.  끝.


* 추신: 그리움이란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당사자가 서로 상대방의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물리 현상. (아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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