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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Jan 28. 2020

외로운 군중에서 행복한 고독자로

겨울 선재길에서 3화 < 혼자 걷는 길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나는 작곡가이며 여성 포크 록의 대표 가수 장필순의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라는 곡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LG 주유소(지금은 GS 주유소)에서 개업 기념으로 받은 테이프를 통해 나는 이 곡을 처음 만났다. 매혹적인 기타 반주로 시작되는 노래는 가수의 환상적인 목소리와 어울려 내 마음을 단번에 앗아갔다. 쓸쓸함으로 가득한 노래 분위기와 호소력 짙은 가사는 내 마음조차 쓸쓸하게 만들었다. 완벽한 동화, 그 자체였다. 그 후로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배척하지 않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가끔씩 외로울 필요가 있을 거라는 믿음도 지니게 되었다. 외로움이 그 자신의 내면을 성숙시킬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함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현대인은 누구나 군중 속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 지으며 산다. 가정에서는 남편, 아내, 아들, 딸이라는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고 학교에서는 학생, 군대에서는 '용사', 회사에서는 '사원', 동호회에서는 '회원', 국가나 광역자치단체 수준에서는 '국민', '도민', '시민'이라는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는다. 좋은 뜻으로 말하면 더불어 어울려 사는 것이고, 나쁜 뜻으로 보자면 관계망의 사슬에 묶어 사는 것이다. 더불어 어울려 관계망의 사슬에 묶여 사는 현대인은 언제나 외롭다. 수많은 조직에 결속되어 사는 현대인이 외롭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2020년, 다시 떠올리는 '고독한 군중'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은 현대 미국인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며 '고독한 군중'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사망률과 출생률이 함께 낮아져 고령화 단계로 접어든 사회에서는 3차 산업(서비스업)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회에서는 타인의 기대와 취향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타인 지향의 사회적 성격'이 지배적 경향이 된다.


타인 지향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보다는 타인의 입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생각에 민감해야 하고, 회사는 고객의 눈치를 봐야 한다. 개인 미디어의 발달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심화시켜 전통 사회에서 소위 갑의 위치에 있던 공공기관이나 학교도 민원인이나 학부모의 눈치를 본다. 심지어 군대는 어떤가? 병사의 입소식부터 퇴소식, 전역에 이르기까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서비스를 장병과 부모에게 제공한다. 심지어 부모가 자녀의 눈치 봐야 하는 현상은 너무도 오래되어 말할 필요조차 없을 지경이다.


어제의 '갑'이 오늘 '을'이 되었고, 여기서 '갑'인 사람도 저기서 '을'이 된다. 얽히고설킨 사회관계망은 전통적인 갑을 관계를 뒤집는다. 모두가 갑이고 또한 모두가 을이다. 자신 돌보기보다 타인 눈치보기에 익숙한 현대인은 외롭다. 다른 누군가의 부재로 외로운 게 아니다. 나를 잃어버려서, 나의 부재로 외로운 것이다. 이렇듯 나를 잃은 개개인이 모여 고독한 군중이 되었다.


'고독'과 '외로움'


고독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 관계, 연락이 없이 홀로 된 상태를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외로움과 달리 고독은 어떤 일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위키백과]


외로움의 사전적 정의는 혼자가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을 뜻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격리되었을 때 느끼게 된다. [국어사전, 위키백과]


고독과 외로움은 서로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지만 구별하여 써야 한다.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여 외롭게 된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은 어떤 일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부를 하기 위해 독서실에 가는 학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 고독을 포기하면 외롭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은 즐길 수 있다. 내가 선택하면 되니까.


외로움은 자발적 선택이 아닌 관계의 단절로 인한 쓸쓸함이다. 외로움은 마음의 고통이다. 왕따를 당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는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괴롭고 우울하다. 외로움이 지나치면 우울증이 생긴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즐길 수 없다. 외로운 것은 '쓸쓸함의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을 '외로운 군중'으로 다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로운 군중'이 리스먼이 개념화한 현대인의 사회적 성격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불안과 공포와 질투를 낳는다.


우리는 늘 외롭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온전한 나는 없는 것 같다. 00 엄마, 00 아빠, 00 아들, 00 딸, 00 사원, 00 회원, 00 시민, 00 학생 등 관계망에 얽혀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돈을 버느라, 집을 찾느라, 아이들 교육시키느라 허둥대고 발버둥 치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물망에 갇혀 점점 나를 잊고 산다. 아이 둔 부모는 늘 그런 거라 위로하고 잠시의 고통 뒤엔 여유로운 미래가 보장되리라 다독이지만 생각만큼 그 시간은 빨리 오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불안의 그늘이 점점 짙어진다.


불안은 공포와 질투를 마음에 심는다. 불안의 원인은 다양지만 대부분의 불안은 '집착'에 의해 발생한다. 내 아이에 대한 집착이 크면 클수록 불안도 커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벌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이다. 명문대를 보내겠다는 집착이 클수록 불안해진다. 서둘러 뭐라도 시켜야겠다는 조바심은 명문 유치원이나 명문 어린이집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런 집착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불안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다.


지속되는 불안은 공포를 낳는다. 나만 뒤처졌다는 불안감은 금세 공포로 변한다. 나 때문에 아이 인생이 망쳐지는 것 같고, 나 때문에 가족의 미래가 암울해지는 것 같다. 불안은 공포를 낳고, 그 공포는 또 다른 불안을 조장한다. 눈덩이처럼 커진 불안과 공포는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질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은 남이 가진 것에 대한 질투심을 유발한다. 적절한 수준의 질투는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본적인 사회 평등사상은 소유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으며, 옳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적 부나 명예를 이룬 사람들을 단죄하려는 법률의 제정에도 인간의 질투심이 투영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과도한 질투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한계를 넘어선 질투심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한 모든 이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 표출된다. 이쯤 되면 땅을 산 이웃에 대한 배아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이웃이 땅을 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쉽게 무시되며, 땅을 산 자체를 사회악으로 치부하고 멸시한다. 서울대에 들어가는 학생이 극소수이니 서울대를 없애야 학벌 없는 사회가 된다는 식이다. 모든 게 남의 탓이다. 사회나 개인이 이 단계로 접어들면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하다. 누구 하나는 사라져야 내 질투심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극도로 위험한 사회가 도래한다.


겨울 선재길에서 만나는 계곡의 얼음과 물


외로운 군중에서 행복한 고독자로

  

'외로운 군중'은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회적 관계망의 부속물로 전락한 현대인의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각자의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외 어떤 방법이 있는지에 대하여 나는  또렷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높낮이 변화가 크지 않고 걷기에 편한 선재길 혼자 걷기를 나는 좋아한다. 더구나 찾는 이가 비교적 적은 겨울 선재길은 여유롭자신의 생각에만 몰입하며 걸을 수 있어서 좋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동안 누군가와 몇 번쯤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겠지만 도심 둘레길에서의 번거로움에 비할 바 아니다. 편하게 걷다 보면 오로지 내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다. 비록 그 생각이 황당한 상상의 수준에 불과하면 또 어떤가.


오로지 내 생각이라면 그 생각의 경제성을 따지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상상이든 공상이든 쉼 없이 내딛는 두 발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잠기는 생각에 자신만의 내면이 순순하게 담겨 있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해방된 잃어버린 나를 오랫동안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걷다 보면 피식 웃을 일도, 소리 없이 울 일도 쉼 없이 떠오른다. 하얀 얼음과 맑은 물이 내게 말을 건네고 푸른 솔잎과 벌거벗은 단풍나무도 손을 흔든다. 나와 자연이 함께 호흡하고 같이 춤추는 길, 겨울 선재길에서 선 나는 더 이상 외로운 군중이 아니다. 스스로 행복한 고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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