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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Mar 20. 2020

코로나19와 유럽, 오리엔탈리즘의 종말

마스크 너머로 바라본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편협된 시선들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편견과 선입견, 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서양의 예술가들이 동양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모방하거나 표현하려는 하나의 예술 사조 또는 장르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럽 제국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로 거느리게 되는 18-19세기를 거치며 그 뜻은 변질된다.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하여 제국주의적 노동력 수탈과 각종 물자의 약탈을 도모했던 서양 세력들은 아시아 문화는 자신들의 문화보다 열등하며, 아시아인들은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때부터 오리엔탈리즘은 서양보다 열등한 동양의 문화, 서양인보다 두뇌와 신체의 모든 면에서 열등한 아시아인이라는 편견을 포함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게으르고 저급한 동양인과 문화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동양 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의도된 선입견을 비판하며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바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영문학자이자 문명비판론자인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이다. 그는 1978년 출판한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통해 변질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한 서양인의 편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사이드에 의하면 변질된 오리엔탈리즘은 첫째,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는 믿음. 둘째, 동양은 게으르고 정적이기 때문에 서양이 동양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 셋째, 그러한 동양을 구하기 위해 서양이 동양을 식민지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민지 합리화 논리를 담고 있다.


아직도 스멀스멀 몸에 밴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이 출간된 지 4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발전의 과정을 거치며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변화를 겪었다. 동서 유럽을 나누던 냉전 체제가 사라진 후 유럽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 사이 가난한 대가족의 대명사였던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였으며,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도 세계 10위 권을 넘나드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차치하고서라도 대만과 싱가포르, 태국과 베트남 등 과거 서양인이 보기에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나라들이 경제와 문화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 내고 있다. 유럽이 과거의 유럽이 아니듯, 동양도 과거의 동양이 아니다.


그러나 사이드가 그토록 비판했던 서구 유럽 중심 사고는 모두 사라졌을까? 프리미어리그 경기장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동양인 선수에 대한 인종 차별적 행태가 아니더라도 아직 서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동양 문화와 동양인에 대해 근거 없는 무시나 하대가 여전하다. 여전히 자신들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여긴다.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의 모습도 솔직하게 바라보자. 많은 사람들은 아직 세계 문화 중심지로 유럽을 꼽고, 몇몇 사람들이 모인 여행담에서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미국은 현대적이지만 저급하고, 유럽은 오래되었지만 품위가 있다고들 한다. 런던 시계탑과 여왕의 근위대를 보며 감동하고,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그럴듯한 프랑스 음식점에서 값비싼 요리를 먹어 봐야 진짜 여행을 했다고 스스로 마음에 새긴다.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유럽 사람을 만나면 멋지고 부럽다. 그런데 유럽의 거리에 나서면 내 모습은 왠지 초라하다.


서양사람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토록 비판했던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다. 서양 중심주의 사고다. 아직도 여전히 세계 문명의 중심은 그리스 로마고, 중국 문명은 뭔가 부족해 보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한 철학자로 여기지만 공자와 맹자, 노자는 어딘지 촌스럽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사를 배웠고, 그래서 우리는 유럽을 역사의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코로나19와 유럽, 감춰진 서방 세계의 민낯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유럽이 중심에 있었다. 경제력, 국민들의 교육 수준, 내면화된 민주주의, 합리적인 토론과 톨레랑스로 일컬어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까지도 유럽 사람들은 늘 완벽한 모습으로 비쳤다.

중국으로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후, 우한 시장의 비위생적인 동물 거래와, 박쥐를 먹는 자극적인 사진들이 TV 화면에 넘쳐날 때 우리는 같은 동양인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 멀었구나!'


중국의 초기 대응은 물론 부족했다. 정보 제공도 충분하고 투명하지 않았다. 많은 나라들이 중국을 비난했고, 아직도 의료 후진국이라며 손가락질했다. 넘쳐나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1,000개 병상을 갖춘 병원을 1주일 만에 짓겠다며 나섰을 때도 세계인은 놀라기는커녕 쇼를 한다고 냉소했다. 그런 병원이 병원이냐며.......

심지어 우한을 봉쇄하고, 후베이성을 봉쇄한다고 했을 때는 어땠는가? 역시 독재 국가가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며 앞다퉈 자국 국민들을 모셔오기 바빴다. 그렇게 중국은 위기에 섰다.


의료진의 감염이 잇따르고, 울부짖는 간호사의 자극적 영상이 전 세계로 전송되었을 때 어쩌면 우리는 중국의 실패만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이러스에 국경이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은 듯이.

코로나19 발생 현황 <방송 화면 캡쳐>

무대와 장소를 뒤바꾼 반전드리마  

그러나 무대가 바뀌자 상황이 돌변했다. 바이러스는 근거지를 스스로 한정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코로나19는 반전 드라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믿었다. 유럽이라는 이상 사회를. 이탈리아라는 문화 선진국의 수준과 그 국민들의 유쾌함을. 무엇보다 유럽은 동양보다는 나을 거라는 근거 없는 오래된 믿음을.

 

그러나 감염병에 맞서며 드러난 유럽의 민낯은 낯설었다. 한국처럼 기민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중국보다는 수준 높은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예상과 믿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복지국가 유럽, 선진국 유럽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에도 유럽 연합은 태연자약했다. 국경 봉쇄가 필요치 않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감염병을 동양에서 시작된 별거 아닌 감기 정도로 치부했다. 마치 유럽인들은 바이러스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기라도 한 듯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그들이 생각하듯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공포 앞에서 유럽은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쓴 동양인을 멸시하던 그들이 이제는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난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에는 마스크가 흔치 않단다. 하찮은? 생산 시설을 중국과 동양에 의지하며 살아온 탓에 그들에게는 마스크 제조 시설도 찾기 어렵다고 한다.


믿었던 이탈리아의 의료 시스템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무척이나 허약했다. 이미 사망자가 중국의 사망자를 넘어선 이탈리아의 의료 시스템은 지금 붕괴 직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 감염자도 2600여 명에 이르고, 이제는 자격 없는 의대생들을 진료 현장에 투입한다고 한다. 가끔씩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이탈리아의 병원 모습은 그야말로 누추하기 그지없다. 다닥다닥 붙은 간이침대에 이불도 제대로 갖추어 덮지 못한 환자들이 애처롭게 않아 있다. 치료를 받고 있다는 느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저 환자들을 모아 놓은 수용소에 불과한 모습이다.


중국의 1000개 병상을 비웃던 유럽의 민낯이다. 스스로는 100개 병상의 병원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말이다.


어디 이탈리아 뿐인가?

낭만의 나라 스페인,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 북유럽의 복지국가들, 제조업 대국 독일. 이들이 기껏 한 조치라고는 국경 봉쇄와 자국민들의 자택 격리다. 집 밖에 나가려면 허가증을 받아야 한단다. 이것이 질병에 맞선 선진국 유럽의 진정한 모습이란 말인가? 이게 유럽의 사회적 능력이란 말인가? 사회주의 독재국가 중국이니 가능하다는 비아냥을 몰래 감춰둔 그들은 지금 중국보다 더한 사회적 통제를 가하고 있다.


질병통제센터 CDC의 나라 미국은 또 어떤가. 유럽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앞장서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제는 자국민의 외국 여행을 금지했다. 마트에서는 사재기는 공공연하게 발생하고, 대통령은 이를 뜯어말리느라 바쁘다. 우리가 생각했던 시스템 선진국 유럽과 북미 대륙의 감춰진 민낯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종말


마스크 쓴 동양인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던 유럽의 자존심이 구져지는 모습에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의 종말을 본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무장하여 동양을 자신들보다 무능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했던 오래된 유럽 중심주의의 붕괴를 느낀다. 최소한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사회적 시스템 능력에서 서방 세계는 완패하는 중이다.


많은 문명론자들이 911 사태 이전과 이후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구분지어 인식하였듯,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이후도 문명사적으로 새롭게 인식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철옹성같았던  서양 중심주의가 뿌리로부터 흔들리는 순간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오리엔탈리즘의 근원적 소멸이 시작되고 있는 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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