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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물점 Mar 24. 2020

박사방, N번방 회원들에게 고함

텔레그램 성착취 사태에 대한 밀, 에피쿠로스, 칸트의 편지

밀/ John Stuart Mill(1806~1873) / 영국 / 공리주의 철학의 대표자


나는 흔히 자유주의자로 알려져 있소. 나는 평생 동안 사람들의 자유권을 옹호하였소. 개인의 사생활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권리이며, 성인이 되어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하여는 국가는 물론이고 그 어느 누구도 간섭할 권리가 없음을 강조하였소. 심지어 자신이 선택한 행위로 자기 자신이 해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간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오. 물론 사물에 대한 지각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가 위험한 차도로 걸어가거나 정신적 정애로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는 예외이오.


어쩌면 당신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의 자유론을 품고 있을지 모를 일이오. 그러나 나는 결코 당신들의 행위를 변호할 생각이 없고, 나의 자유론 또한 당신들의 생각과는 다르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대들의 행위를 비판하오.

첫째, 내의 자유론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소.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나의 자유는 당신의 얼굴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자유는 결코 옹호될 수 없다는 뜻이오. 당신들은 순간적인 육체적 또는 정신적 쾌락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했소. 그러니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해 획득한 당신들의 쾌락은 용납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이 아니오.


둘째, 당신들의 즐거움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은 스스로 그러한 행동을 선택한 게 아니오. 판단력이 미숙한 미성년자를 돈을 미끼로 강요하여 취한 당신들의 자유는 개인에게 보장된 자유와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진정한 사회적 자유의 증대를 위해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행'에 해당하는 것이오. 나는 평소 다음과 같이 주장했소.


"단 한 사람만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침묵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당신들의 행위에 반대 의견을 내고 있소. 당신들의 즐거움에 희생된 사람들은 또한 어떨 것 같소? 그들은 아무 의견이 없이 스스로 선택해서 그렇게 한 것이오?  


그러니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소.


"당신들은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억압했고, 타인의 침묵이 강요되고 선택권이 박탈된 상황을 보고 침묵하였거나 동조하였으므로 절대적으로 유죄요."


에피쿠로스 / Epikouros  (기원전 341? ~ 기원전 270?) / 그리스 / 쾌락주의의 시조

죽어가는 갈리아인(다음 백과)

"지금 당신들의 목에는 고통의 밧줄이 걸리고, 당신들의 정신은 점점 비참하게 추락하고 있소. 고통으로 일그러진 죽어가는 갈리아인의 모습에서 당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소?"


나는 흔히 쾌락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소. 중고등학교 시절 '에피쿠로스-아타락시아'를 되뇌며 고통스럽게 암기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오. 내가 쾌락주의를 주창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나를 물질적-육체적 향락을 추구한 방탕한 쾌락주의자로 오해하고 있소. 이는 정말 터무니없는 오해이고 나에 대한 몰상식에서 비롯된 것이오. 내가 생각하는 쾌락주의가 무엇인지 먼저 제대로 알려 주고, 텔레그램 사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겠소.


"최고로 행복한 것은 스스로 근심을 겪지 않으며 모든 것에 근심을 끼치지 않는 것"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욕망과 근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오. 내가 쾌락주의로 알려지게 된 것은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위해 위해 고통의 회피를 주장했기 때문인데, 사후 세계를 부정하고 현 세계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나의 철학이 기독교의 오해를 받아 물질적-육체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오해를 받은 것이오.


나는 '어떠한 욕망도 없는 고요한 상태'를 최고의 쾌락 상태로 여긴다오. 고통의 최소화는 욕망의 최소화로 달성되기 때문이오. 욕망을 최소화한 상태를 '아타락시아', 즉 마음의 평정 상태라고 부르는 것이오.


우리 학파의 견해에 비추어 텔레그램에 참여한 당신들은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소.

첫째, 나는 근본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 욕망을 줄여야 한다고 했소. 그러나 당신들은 욕망을 극도로 추구함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했소. 욕망은 추구하면 할수록 더 커지는 법이오. 당신들은 모두 욕망의 블랙홀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한 것이오. 그 결과는 무엇이오? 행복을 얻기는커녕 근심과 걱정만을 얻지 않았소?  


둘째, 당신들은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증대하기 위해 그와 같은 선택을 했다고 항변할 것이오. 그러나 그것은 분별력이 없는 행동이오. 분별력 없는 선택은 삶의 만족을 가져오기보다는 자칫 무한한 정신적 욕구로 흘러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다는 것이 당신들보다 2300 여 년이나 전에 살았던 우리 학파의 생각이었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이성과 합리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당신들에게 그토록 분별력이 없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결국 당신들의 그런 선택은 오늘날 당신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유발하고 말았소.  


칸트 / Immanuel Kant(1724 ~1804) / 독일 /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도덕철학자


나는 나의 저서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세상에서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선의지뿐임을 강조하였소. 선한 의지는 비록 그 의지가 좌절한다 해도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오. 또한 나는 정언명령이라고 불리는 도덕 법칙을 제시하였소. 정언명령은 모든 행위들의 도덕적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나는 이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접하고 분노를 금할 수 없었소.


첫째, 당신들의 행위는 결코 선한 의지에서 출발하지 않았소. 동기가 선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고 당신들 자신도 고통의 나락에 빠지게 된 것이오.


둘째, 당신들은 나의 첫 번째 정언명령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에 정면으로 어긋나오. 당신들의 행위는 입법 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보편적 정서와도 거리가 머오.


셋째, 당신들은 '다른 사람과 당신 자신을 결코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라'는 나의 두 번째 정언명령을 따르지 않았소. 즉, 언제나 인간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개인적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았으니 이는 절대 사람으로 행할 일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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