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냐에게

by 시모

안녕 라자냐야. 우리가 못 본 지도 3년이 지났구나. 오늘 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가 기억하는 너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써보려고 해.


십년 전 나는 영어학원을 열심히 다니던 초등학생이었어. 그리고 그 학원에서 배우던 교재에서 너의 존재를 알게 됐단다. 교재의 제목은 ‘요술램프’였고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 다만 너의 존재감은 확실히 기억나. 네모 넓적한 기묘한 생김새에 이름도 특이했지. ‘Lasagna’라고 쓰여있는데 발음은 ‘라작냐’가 아니라 ‘라-자-냐’라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어. 들어가는 재료도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어.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너를 먹어 볼 수 있는지 몰랐어. 12년 만에 내 인생에 존재를 드러내 놓고는 앞으로도 너를 먹어보지 못할 것만 같았지.


그런 너를 다시 만난 건 5년 뒤였어. 고등학생 때 연극을 보러 갔던 날이었는데, 처음으로 ‘진짜’ 너와 대면한 날이기도 했어. 친구들과 나는 낯선 혜화의 식당거리를 한참 기웃거렸어. 정해진 시간 내에 점심을 해결해야 해서 결국 다급하게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들어갔던 것 같아. 메뉴판을 훑는데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메뉴가 있었으니, 바로 그게 너였던 거야! 모두 파스타나 리조또를 시키는데 나는 너를 주문해야만 했어. 영어 교재에서 처음 너를 발견한 순간부터 한 번도 너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야.

그림이 아닌 네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해. 널따란 면이 케이크처럼 보기 좋은 모습으로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지. 단면 사이로 치즈가 줄줄 흘러내렸고 라구 소스에는 고기가 가득했어. 샌드위치 같은 모양에 맛은 피자나 스파게티와 비슷했던 것도 같아.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맛이야!’라고 생각했어.


감격스러운 재회 이후 다시 너를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역시나 우연찮은 순간에, 이번엔 아주 달라진 모습이었지. 포르투갈에 머물며 한 가족의 일부가 된 적이 있어. 엄마는 파티마였고, 오빠는 루벤과 패드릭 그리고 고양이는 수리와 헤리였어. 이 들의 집에 머무르며 자주 요리를 했고 술도 마셨어. 모두 저마다의 바쁜 일상이 있었기에 혼자 먹는 날이 많았지만, 하루는 달랐지.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던 내게 “라자냐 먹을래? 엄마가 만들어 놓으셨어.” 하고 루벤이 묻더라고. 너를 만들다니! 왜 그 생각은 못 했을까? 반갑고도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좋아”라고 대답했어. 설레는 마음으로 루벤이 커다란 오븐 용기를 꺼내는 것을 지켜봤지. 파티마가 만든 너에게서는 소스에 절여진 고기나 치즈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어. 대신 큼직하게 썰린 가지나 피망이 잔뜩 씹혔어. 면 층 사이사이 바른 소스도 파티마가 직접 만든 모양인지 작은 토마토 조각들이 보였어. 내가 알던 기름지고 자극적인 과거의 너와는 사뭇 다른 맛이었지. 파티마가 해주었던 아로즈 꼰 레체나 야채수프만큼 푸근하고 담백한 요리였어. 이걸 먹으며 아주 오래 전과 조금 오래전에 너와 내 모습이 떠올랐어.



너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처럼 그렇게 내 삶에 들어왔어. 꼭 처음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친해지고 싶은 친구, 한참 후 만나 실제로 대화해보니 더 매혹적인 친구, 알고 보니 무척 다정하기까지 해서 가족처럼 나를 감싸주는 그런 친구 같았지. 다시 너를 만나게 되는 날을 기대하고 있어. 오늘 너에게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다니던 영어학원 선생님의 ‘그때 그 교재에 나온 라자냐’ 레시피 포스팅을 우연히 발견했어. 나처럼 “도대체 이 음식이 뭔데!” 하던 아이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하고 정성 들여 찍은 사진도 올리셨더라고. 오래전 글이라 그걸 볼 때 초등학생 때가 생각나서 괜히 애틋해지더라.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이 포스팅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이번엔 내가 너에게 먼저 다가가 보려 해. 조금만 기다려줘! 부엌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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