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까지는 고버스를 탔다. 카이로의 고터에서 버스를 타고 세 시간을 가면 됐다. 버스여행 최대 난관은 버스 탑승이었다. 전광판과 플랫폼이 있는 서울 고터의 안락한 파미예스테이션은 천국이었다. 애초에 터미널이 대로변에 있는 것부터 조금 수상했다. 항상 막히는 8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터미널이 편의점만한 크기로 작게 있길래 버스는 도대체 어떻게 타는 것인지 궁금했다. 터미널에서는 표만 팔고 버스는 내가 근처 주차장에서 직접 찾아야만 했다. 주차장에서는 버스가 손님을 찾는 게 아니라 손님이 버스를 찾는다. 주차장에는 비슷비슷한 버스가 줄지어 있었다. 차마다 행선지가 써있는데 전부 아랍어로 써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만나는 버스마다 가서 “혹시 알렉산드리아?”를 물어본 끝에 내 버스를 찾아서 탔다. 처음에는 안 물어보고 ‘알렉산드리아’라는 아랍어만 외워서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찾으려 했다. 근데 일단 다들 ‘알렉’이라 쓰는 것을 둘째 치고 모하람-버스스탑(알렉산드리아 고터 이름이었다)이라고도 썼기에 찾기가 난해했다. 그리고 여행 5일차라 비-아랍어권 언어 사용자의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랍어를 왼쪽부터 읽어댔기에 찾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리드산렉알’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버스는 세 시간을 갔다. 버스 안에서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기도문이 세 시간 내내 흘러 나왔다. 고속도로가 흔치 않은 이집트지만, 카이로-알렉산드리아 사이에는 넓직한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그래서 순식간에 잠에 들었고 눈을 떠보니 알렉산드리아였다. 가는 내내 잠만 잤기에 버스에서의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조금 긴장한 나머지 이집트 버스에서는 안 자려고 했는데, 10분 정도 늦게 잠에 들었을 뿐 수면의 질은 한국과 동일했다. 어쨌든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그 모하람 버스스탑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에서 내리니 수많은 로컬 택시기사들이 날 반겼다. 웰컴. 알렉산드리아에 온 걸 환영한다. 너 호텔이 어디니? 어떤 기사와 아래의 대화 끝에 흥정이 잘 되어 50파운드에 숙소까지 가기로 했다.
-너 어디 갈래?
-알렉산드리아 그린 플라자?
-200파운드 어때?
-50파운드?
-그럼 100파운드?
-50파운드?
-그럼 70파운드?
-50파운드?
-타라
이런 과정을 통해 50파운드에 택시에 탔다. 여기까지만 보면 내 승리처럼 보이지만 내릴 때는 80파운드 줬기에 결국 기사가 승리했다. 일단 타자마자 터미널 주차비를 요구했다. 터미널이 유료주차니 10파운드 더 내라! 매번 쓰는 수법이라 그냥 못들은 척 했다. 그러다 가는 도중 옆 차선 차량과 시비가 붙었다. 사실 우리 차가 너무 공격적으로 차선변경을 해서 벌어진 문제였다. 아랍어라 말은 하나도 이해 못했지만 상황은 다 이해했다. 너 왜 막들어와-> 왜 시비야->너 몇 살이야 같은 식의 언쟁이었다. 서로 사이드미러를 날려먹을 기세로 바짝 붙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붙어서 달리는지 무서워서 운전석 쪽으로 붙어 앉았더니 기사가 갑자기 ‘쫄지 마라’고 다그쳤다. 그렇게 니가 쫄면 우리 차가 지는거다! 그런 약한 마음으로는 이길 수가 없어! 그래서 안전운전 하기로 하고 80파운드 냈다. 30파운드는 일종의 ‘안전료’로 지불한 것이다. 안전료를 지불하고 시비는 일단락됐지만 아무리 봐도 우리 차 잘못이었다. 근데 또 택시기사 화를 돋우면 안 됐기에 나도 옆차 욕을 열심히 거들었다. that stupid car!
알렉산드리아에는 커피 마시러 왔다. 구글지도에서 역사와 전통이 깃든 헤리티지 커피집을 찾다가 소피아노파올로Sofianopoulo라는 로스터리를 찾았는데 시내 한복판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소피아노파올로 로스터리 가주세요. 뭐 젊은 친구 무슨 로스터리? 소피아노파올로 로스터리요. 정지돈의 책에는 표류에 가장 적합한 이동 수단이 택시라는 기 드보르의 말이 나온다. 정해진 길 없이 도시를 누비는 택시가 플라뇌르의 산책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플라뇌르는 도시 곳곳을 정처 없이 누비며 사유하는 방랑자이자 도시 산책자다. 맞는 말이지만 이집트 택시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아무 것도 사유하지 못했다. 도착할 무렵에야 내가 입력한 목적지가 남대문시장 한복판이나 다름없음을 알게 됐다. ’누가 이런데까지 차를 타고 오나?‘싶은 좁은 사거리에 내가 내렸다. 슈크란. 좁은 길로 시장 안까지 들어오느라 고생한 택시기사에게 인사하는 순간, 길거리에 앉아서 청바지를 팔던 청년이 말을 걸었다. 웰컴 투 알렉산드리아.
택시에서 내리니 갑자기 시장 한가운데였기에 약간은 벙찐 상태였다. 사방으로 펼쳐진 노상 시장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다. 배낭여행에서 가장 취약한 순간은 사진 찍느라 정신 없을 때다. 아까 청바지를 팔던 남자가 갑자기 또 말을 걸었다. 그는 시장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우겼다. 진짜냐고 물어봤더니 자기한테 1불 내면 괜찮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수법이었기에 무시하고 그냥 카페로 곧장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힘들게 도착했다. 소피아노파올로 로스터리!
소피아노파올로 로스터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시내에 있는 고풍스러운 카페다. 잘 관리되어 광이 나는 나무 벽면에는 1908년이라는 글자가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은은하게 빛난다. 그 아래에는 ‘커피의 고향origin of coffee’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문구가 적혀 있다. 덕수궁 정관헌에서 고종황제가 커피를 마시던 때와 시기가 비슷하다. 반대쪽을 바라보면 커피콩으로 된 장독대가 있다. 실험실을 연상시키듯 도열한 원통형 유리 진열장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커피콩이 한가득 들어있다. 로스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대한 로스팅 장비가 곳곳에 놓여 있기에 막상 앉아있을 좌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너무 작은 캐리어를 가져왔기에 한국에는 단 한 팩의 커피콩만 가져갈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도대체 무슨 커피콩을 사가야 할까? 이집트 콩은 없는지 물어봤더니 점원은 진짜 맛있는 커피는 이집트 밖에 있다며 브라질 원두를 권했다. 그래서 브라질에서 수확해 이집트에서 볶은 콩을 한국에 사가게 됐다. 한편 카페에서는 콩을 샀으니 뭔가를 마실 차례였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깃든 장소에서 몹시 불경하게도 그만 아이스 커피를 주문해버렸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주위들 둘러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가게에서는 모든 종류의 음료-심지어 믹스커피와 레드불도 팔았다. 립톤과 네스카페 박스를 쌓아놓은 진열대 옆에서는 이브릭을 내렸다. 네가 먹고싶은 커피를 시켜라. 이것이 1908년생 원로 카페의 정신이었다.
물론 아이스커피 주문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가게 구석의 가장 후미진 자리에 있었다. 위치만 놓고 보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리스타는 아이스 프라페 같은 것을 만들어 주었다. 우유와 샷이 들어가고, 각종 달달한 것들이 들어간 뒤 초코 파우더를 뿌리는 즐거운 음료였다. 아 역시 맛있네. 정말 맛있었다. 근데 막상 아이스를 먹고는 한국에 이브릭 기구도 사왔다. 이브릭을 내려먹지는 않더라도....그것이… 낭만이니까....
세계 커피 수도에 왔는데 커피를 한 잔만 마시기는 아쉬웠다. 시장을 따라 동쪽으로 걷다가 또다른 카페를 발견했다. 델리시스Delices 알렉산드리아. 1922년에 개업했다고 써있길래 들어갔다. 1922년이면 신상 카페네. 구글지도를 찾아보니 디저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가게에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빵과 케이크가 산뜻한 인사를 건낸다. 여기서는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했다. 케이크 종류가 백 가지도 넘어서(과장x) 한참 동안 뭘 먹을지 골랐다. 홀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연주된다. 사실 이 카페는 휴게음식점이 아니라 일반음식점이다. 온갖 시그니처 칵테일도 파는데 이름이 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클레오파트라'와 같아서 킹받음과 동시에 궁금해졌다. 장고 끝에 라즈베리 초코 케이크를 시켰다. 커피는 아주 뜨겁고, 케익은 아주 차가웠다. 커피는 아주 쓰고 케익은 아주 달았다. 동시에 먹으니 신묘한 조화가 입 안에서 만들어졌다. 끓는 물에 얼음을 섞어 미지근한 물을 만드는 느낌? 어쨌든 맛있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코니쉬라는 해변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걸었다. 이집트에서는 어느 도시를 가도 워터프런트 앞 도로를 코니쉬라고 부른다. 아랍어가 아니라 사실 corniche라는 영어였다. 등 뒤에서 노을이 지며 지중해의 북쪽 수평선이 타오르듯 붉게 물들었다. 낭만이 그야말로 작열했으나 데이터가 안 터졌기에 속은 몹시 답답했다. 숙소로 돌아가려면 택시를 타야 했는데, 택시를 부르려면 데이터가 터져야 했다. 언젠가는 데이터가 터지겠지 하는 믿음 하에 동쪽으로 계속 걸었다. 이집트에 오면서 직장인의 호연지기로 SKT 로밍을 했다. 주요 관광지에서는 로밍이 잘 되었지만 조금만 어딘가로 벗어나도 금방 신호가 끊겼다. 대도시에서도 이렇게 안 터질 때가 종종 있었다. 원래 휴가 중에도 중요한 전화는 받으려고 로밍을 했는데 막상 그럴 만한 전화는 오지 않았다. 어쨌든 로밍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해변 도로는 왕복 8차선 대로였다. 길 건녀편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지만 막상 길을 건너지는 못했다. 이미 어둑어둑한 가운데 횡단보도 없는 8차선 도로를 건너기에는 너무 무서웠다. 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은 서울과 비슷했다. 비현실적으로 차가 막혔고 경적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런 곳에서는 택시가 잡혀도 오히려 문제일 것 같아서 길 건너편의 석양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다시 도서관까지 걸어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앞은 역시나 데이터가 잘 터졌고 택시도 쉽게 잡혔다. 대도서관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명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스노헤타의 설계로 2001년에 재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