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리야드 SV897 탑승기
너 우리 빵 좀 먹을래?
빵이요?
우리 기내식 안 먹을 거거든.
리야드행 비행기 옆 자리에 앉은 사우디 부부는 출발 전부터 빵을 권했다. 타자 마자 이들은 좌석 트레이 두 개를 활짝 펼치더니 파리바게트 빵을 잔치상처럼 늘어놓았다. 마들렌이나 피낭시에 같은 구움과자가 적어도 열 개는 되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바쁘게 탑승하는 있는 와중이었다. 사우디아 항공 비행기였기에, 국적기에 탄 내국인이 기내식을 안 먹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대한항공 탄 한국인 중에 비빔밥을 거르는 사람이 있던가? 처음에는 예의상 거절했는데 이들이 다섯 번째 빵을 먹을 무렵 마들렌을 재차 권하자 조금 고민이 되었다. 진짜 우리 빵 안 먹을래? 지금 너무 배불러요. 빵은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추석 다음 날이었기에 명절 과식의 여파로 배가 부른 것이 사실이었다.
너 사우디아 항공 처음 타보니?
네 처음이에요. 타보셨어요?
우리는 사우디 사람이잖아. 당연히 많이 타봤지.
비행기가 출발하기도 전에 이들은 재빠르게 식사를 마쳤고 실제로 기내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이륙이 다소 지연되었기에 식사 이후에도 스몰토크를 나눴다. 나는 비행기에서 먼저 말을 걸지는 않지만, 누가 말을 건다면 열심히 대화하는 편이다. 사실 한국어 쓸 때 성격과, 영어 쓸 때 성격이 약간 다르기도 하다. 사우디 남자 약사(미국계 제약법인의 약사라고 했다)는 내 이집트 여행계획을 듣더니 일정 참 잘 짰다고 칭찬을 했다. 룩소르 좋지. 거기는 볼 게 많다. 아 그런데 사실 우리는 안 가봤어. 알렉산드리아도 가요. 아 거기도 좋지. 아내분(간호사라고 했다)도 거들었다. 지금 같을 때 가면 최고야. 거기서는 몇 박인데? 1박이요. 그래 좋긴 한데 1박이면 충분하다!
이집트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사우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집트도 좋지만 나중에 사우디를 꼭 가봐라! 사우디가 뜨고 있다(saudi is booming!)는 말은 두고두고 생각났다. 어쩌면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를 진즉에 예견한 것일지도 몰랐다. 네옴시티에 대해서 물어보자 아주 격한 호응이 이어졌다. 내가 건축을 전공했다고 하니 거기 가서 일자리를 구하라는 말도 들었다. 나중에 한국 돌아갈 때는 기념품을 사우디에서 사가라고도 했다. 너 대추야자 먹어봤니? 커피랑 같이 먹으면 작살난다. 이렇게 거의 한 시간을 대화했고, 비행기는 예정보다 늦게 인천공항을 떠났다. 나는 이미 사우디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첫 번째 식사시간에는 나만 밥을 먹었다. 밥과 소고기, 그리고 거대한 쿠키로 이루어진 간단한 식사였다. 맛은 평이했다. 식사 이후 비행기가 중국 상공을 지날 무렵 소등이 되면서 비행기 안이 어두워졌다. 야간비행이었기에 잠을 잘 시간이었다. 나는 복도 쪽 35C에, 사우디 부부는 안쪽의 35A와 35B에 앉아 있었다. 불이 꺼지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35B에 앉은 남자가 본인 양 옆의 팔걸이를 일제히 올렸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대화를 나눈 뒤로 약간의 친밀감은 갖고 있었으나 팔걸이를 올릴 정도는 아니었다. 난처해하는 사이 기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는 별안간 좌석에서 내려와 비행기 바닥에 앉더니 본인 좌석에 엎드려 잠을 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자가 쓰러진 줄 알고 깜짝 놀라서 승무원을 호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그는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바닥에 앉아 뒤척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저렇게 잘 수도 있구나.
이후에도 그는 모든 수면 자세를 하나씩 시도해보는 사람처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잠을 잤다. 결국 남자는 바닥에 일자로 누워 잠이 들었다. 기내가 몹시 어두웠기에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앉아서 발을 뻗다가 바닥에 무슨 짐이 있길래 봤더니 그 남자 다리였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 바닥에 누워서 잘 수 있지? 그는 스스로 지하의 퍼스트 클래스를 만들었다. 남자가 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이 아내분은 이코노미 두 자리를 누워서 갔다. 불편한 것은 나뿐이었다. 근데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앞 자리를 보니 앞 자리 사람은 이코노미 세 자리를 누워서 가고 있었다.
오랜 대화를 했음에도 작별은 빨랐다. 결국 팔걸이를 다시 내리지 못한 채 비행기는 리야드에 착륙했다. 착륙 직전 불이 켜지자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서 일어나 정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전 세계 안 가본 곳이 없다더니 다 이런 식으로 다녀온 것일까? 여자 역시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착륙을 기다렸다. 공중에서 있던 일은 다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출발 전에 이들이 보인 호의가 단지 좀 더 편하게 앉아 가려는 술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로 만나서 반가웠다고 인사하고 환승 게이트로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았다. 리야드 공항 새벽 네 시였다.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때도 리야드를 경유했다. 4시간을 경유해야 했기에 걱정이 컸다. 그런데 네이버 블로그를 찾다 보니 ‘리야드 공항 편의시설의 모든 것’이라는 글이 있었다. 어떤 한국인 여행자가 4터미널 내 모든 편의시설을 사진과 함께 친절히 정리해 둔 글이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명당 자리가 있다며 2층 푸드코트에 올라가라는 추천이 글 말미에 있었다. 보물지도 같은 글의 설명을 따라가니 메자닌처럼 생긴 2층이 있었고, 널찍한 공간에는 온갖 편안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꽁꽁 숨겨져 있는 메자닌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환승 비행기를 기다렸다. 넓고 큰 안정된 공간에 앉아 있으니 대추야자와 커피를 꼭 마시라던 사우디 약사의 추천이 생각났다. 아쉽게도 새벽이라 그 조합을 함께 파는 곳은 없었다. 대신 팀홀튼에서 더블더블과 글레이즈드 도넛을 먹었다. 사우디에서 왜 캐나다 커피를 마셨나? 리야드 킹 칼리드 국제공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