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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n 05. 2020

학생자치 시리즈 제 1편

학교에서의 고민은 집에 갔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삶에 깊이 들어와 박혔다. 굵직한 문제의식과 질문들이 강박에 이르면 제법 큰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의 모양이 확실히 1학년 때와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 것들, 어느 정도 답이 내려진 것들, 이제는 노력하지 않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이우수업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1학년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2학년도 자치하는 친구들만 해요?”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다. 낯설었다. 분명 나도 1학년 때 수도 없이 했던 고민이었다. “결국에 참여하는 애들만 하잖아”, “선배들 중에서도 저기서 봤던 선배들 여기 있고, 여기서 봤던 선배들이 저기 있잖아.”라며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음에 그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이상한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에는 온도 높은 몇 명이 이끌어나간다는 회의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치의 중요성과 의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작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는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그 끄덕임의 진정성을 의심했을 것이다. 이우학교에 들어오면 모든 학생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그런 역동적인 모습을 상상했으리라. 상상과는 다른 현실에 실망, 배신, 회의, 좌절. 


“결국 이야기장에 오는 친구들은 정해져있다.”

1학년 때 이야기장을 준비하며 한 말이었다. 이야기장에 와달라고 일일이 요청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친구를 설득하면 올지 논의를 거쳤다.

“아 이 친구는 올 것 같아”

“얜 말해도 안 올 것 같아”

“이 멤버가 그 멤버네.”

“고민하는 애들만 고민한다.” 하는 말.

한 친구가 맡는 게 너무 많아 생기는 역할갈등은 예삿일이었다. 


이를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더랬다.

(지금 1학년층에 붙은 대자보를 보라. 익숙하지 않은가?) 


이제 와서 듣는 그 고민의 제목이 너무나 낯설다. 이제는 다 끝나고 그 흔적만 남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후배의 질문에 대한 답은 


“2학년은 그런 문제의식이 없다. 그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외부조건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아직도 “주인의식”과 “주체적인 참여 부족”은 문제가 된다. 고민하는 애들만 고민한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현상을 살펴보자. 소수가 많은 역할을 담당하며 죄다 해내고 있다. 정리해보니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다.   


학년 이우수업팀 5명 중 4명이 학년회이고, 나머지 한 명은 총학생회부회장이다.

학년 학년회 10명 중 6명이 동아리부장이다.

예준위 초기 멤버 3명 중 2명은 학년회이다.

학년 학년회 중 2명은 ESC이며, 페미니즘 소모임도 동시 참여하고 있다.

, 농준위도 있다.

이 충격적인 실태를 보라.

 

 하지만 더 이상 많은 학생들이 ‘자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는 자치의 정의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1학년 때 자치는 ‘주요한 활동’으로 정의되었지만 올해 초 14기 학년회 선거를 하면서 ‘자치는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선거에 나온 모든 당이 확장된 자치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치를 잘 하고 있다는 목소리였다. 


 그에 대해 고민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이제는 인식이 바뀌었다. 인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후배의 질문을 받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식의 변화로 끈질기게 고민했던 문제의식이 사라진 것이다. 문제가 ‘해결’됐다고도 볼 수 있겠다. 


 주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가 나오면 ‘그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성문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인식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현실성이 가장 낮은 방향으로 ‘인식’되어 있다. 나 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무엇 하나 공론화시키기 어렵다. 어디에나 온도차는 있고. 서로 귀 기울여 듣고 공감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캠페인이 이뤄지기도 하지만. 일 많은 총학이 안건으로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아리나 프로젝트팀, 혹은 개인이 주로 상품 판매나 서명 운동을 통해 무언가를 알리려는 노력은 많았다. 캠페인은 곧 홍보이기 때문에 총학과 학년회에서 진행하기 힘들다. 홍보는 주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일’은 일이라고 불리는 순간 ‘의미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드물다. 잡일을 동반하기 때문. 


그래서 이번 사례는 더욱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변화’가 실제 가능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희망을 본다. 


 인식의 변화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선거철에만 가능한 것일까? 선거철에는 모두가 각 주제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하고, (그것이 건강한 비판이든 비판을 위한 비판이든 간에) 모두가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때문에? 학년회보다 더 큰 단위인 총학 선거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있는지 의문이다. 길게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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