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섹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성교육을 배우지 않을까.
왜 우리는 상대와 몸에 대해서, 나누는 행위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며,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지 체화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섹스라는 말이 나오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섹스를 선망할까. 왜 우리는 섹스에 대해서 배운 적 없음에도, 마치 그것이 사랑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수단인 양 믿고 있을까.
모두는 섹스를 안다. 또한 우리는 모두가 섹스를 안다는 것을 안다. ‘음란마귀’ 라는 비범한 단어를 보라.
외에도 섹스의 앎을 내포하는 단어들은 많다. 우리는 ‘므흣’ 하거나 ‘꼴리는’ , 또 ‘라면 먹고 갈래?’ 와 ‘소방차는 멈추지 않아 boy’를 안다. 그 말을 했을 때 모두가 향유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섹스는 모두가 동시에 공유하는 거대한 이미지이다. 이 지점에서, 이미 문제는 발생했다.
우리에게 섹스는, 야릇한 분위기속에서, 성별에 따라 부각되는 부위를 만지고, 격한 신음 소리가 나오는. ‘이미지’다. 야하고, 흥분되고, 쾌감으로 선명한 거대한 ‘이미지.’ 이미지는, 다소 취약하다. 생략되거나 다루지 않은 부분이 상당하다. 그렇기에 이미지의 섹스를 향유하던 많은 자들은 실제의 영역에서 섹스를 마주했을 때 균열을 느낀다. 원하던 쾌감이 아니라던가, 상대를 위해 알고 있는 이미지대로 연기를 한다던가, 원치 않은 임신의 공포를 느낀다던가, 피임의 방법에서 난감함을 느낀다던가. 이것은 쉬이 넘길 균열이 아니다. 매우 이상하며, 불쾌하기까지 한 균열이다. 그러니 제기되어 오지 않은 물음을 던지자. 실제의 영역에서의 섹스는 왜 이제껏 고려되어 오지 않았나? 왜 대다수는 ‘무지’ 의 상태로 섹스를 마주해야 했나.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 ‘하고 나면 후회해요.’ 꾸준하게 제기되고 공감 받아온 문장들이다. 이미지를 위해 실제가 존재하는 느낌이 역력하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알고 있던 대로’ 섹스를 한다.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섹스’를 거듭한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이 모든 균열의 탓을 성교육에게 하려한다. 꽤나 째려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성교육을 배워왔을까?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의 성교육 교육과정을 보자.
성교육 자료를 미루어 보아 행위 자체에 대해서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에게 계속해서 무지하기를 요구 받는 듯 하다. 목차에도 나오듯, ‘학생답게 예쁘게 사귀렴.’ 과 같은 말처럼.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행위’ 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담론 형성도 없이 지나간다. 그러니 학교에서 성교육을 배운 이후에도 섹스에 대한 인식은, 결국 과시용 입담, 야한 썰, 수치스러운 소문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행위’ 가 내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쟁점들은 단 한 번도 논의되지 못했고, 행위가 실제의 영역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식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성교육 자료를 보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행위’ 인 섹스에 대한 서술이 분명 담겨 있다. (2016 중,고등학교 성교육) 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인식’ 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이는 ‘인식’ 하기 전에 먼저 ‘감각’을 배웠기 때문이다. 성교육 자료들을 읽어보면, 형용사가 다수 등장한다. ‘놀라운 탄생’, ‘소중한 임신’ 과도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교육과정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임신, 성생활, 피임, 성매매를 다룬 단원을 읽을 때면 이것은 몹시 소중한 것, 몹시 엄청난 것, 몹시 중요한 것, 그렇기에 몹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 과 같은 ‘감각’ 이 앞세워진다. 이후에 배우는 지식들은 다소 무용하다. 결국은 느낌을 기반으로 형성된 인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끝내 우리가 체화하게 되는 것은, 실제의 영역에서 섹스는 어떤 것이고 어떤 요소들을 갖추어야 하는 지, 섹스에 임하는 방식이나 관점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는지 와 같은 ‘인지’ -성찰의 영역이 아닌, ‘부끄러움’, ‘조심스러움’, ‘엄청난 것’, ‘쾌락적인 것’ (...) 이라는 감각뿐이다.
이 감각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일정 연령층이 지나도 하지 못하는 자를 ‘엄청나고 쾌락적인 것’을 쟁취할 능력이 없는 자로 여기며 조롱을, 누군가에게는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것’을 함부로 했다는 질타를,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고 쾌락적인 것’을 쟁취했다는 과시를, 누군가에게는 ‘부끄럽고 조심스러운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킨다. 참으로 기형적인 구조다. 모순적인 감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모른 채 할 뿐이다. 감각에서 비롯된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으며, 누군가는 분명 이 구조 속에서 소비되며, 멸시 받고 있다.
성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실제의 영역에 있는 섹스를 인식하는 것.
현실에서는 핑크빛 필터가 없다. 배경음악도, 두근거리는 심박소리가 옆에 써지지도 않는다. ‘미루어 보고’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이미지 속에서 통용되어온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니라. 각자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감정으로 임하는 지, 혹은 어떤 감정으로 임하고 싶지 않은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섹스에 임하는 방식이나 관점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지는 않는지,를 생각하며, 함께 나누어야 하는 쟁점들을 (분명히 이루어져야 하는 윤리, 감정, 호혜성, 관계, 욕구의 주장, 한계성의 설정 등)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바로 이 쉽지 않음에 성교육의 역할이 있다.
@이선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