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어떤 활동보다는 순간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예비소집일 때의 그 어색했던 순간, 대학로에 연극 보러 갔을 때 조금은 친해졌다고 느꼈던 순간, 한꿈 때 웃으며 노래하는 우리 반이 예쁘다고 느낀 순간, 많은 사람들이 날 위로하기 위해 선뜻 시간과 마음을 내주던 순간. 이런 예쁘고 따뜻한 기억들 뒤에는 밤새 과제하면서 울던 시간, 주말을 모조리 학교에 받치던 기억들이 있지만 선명하진 않아요. 시간이 지나서 미화되고 예쁜 것만 남기고 싶은 건가 봐요.
한 학기 동안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아요. 기본적인 교과 공부와 다양하고 새로운 비교과 활동, 각종 자치 활동들을 다 해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어요. 이러한 환경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이상을 만남과 동시에 역량 부족이라는 나의 현실에 부딪혔어요. 시간에 쫓겨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도 많았고 항상 피곤했어요. 이런 나와는 다르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해내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껴져서 속상하기도 했어요. 특히 교과 공부와 그 이외 활동 사이에서 고민할 때는 하나를 포기해야할 것 같아서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아무리 고민해도 어느 한 쪽을 포기한다는 선택이 너무 어려워서 그냥 내 역량을 키우기로 했어요. 작은 시간들을 더 알차게 쓰고,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구분해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는 이상에서 능력 부족이라는 현실을 만나고, 이 고민들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가던 반년이었어요.
나 자신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뭘 하고 있는 건지. 주로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많이 떠올렸던 질문들인데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들이었어요. 어떤 일에 대한 나의 의지와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끔 했어요. 이 질문들을 통해 모든 것을 온전한 나의 선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후회는 해도 원망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학기 초에 내가 원하는 1년 뒤 나의 모습에 대해 쓰는 과제가 있었는데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썼어요.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관찰하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능력과 욕심들을 알게 됐어요. 나는 무대라는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 크면서도 춤추고 노래하는 것에 대한 욕구가 있었어요. 또 지금까지 느껴왔던 것과는 달리 개인 학습능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10살 이후 처음으로 혼자 수학 공부를 했는데 잘 안되고 점점 뒤처지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어요. 이처럼 솔직하게 느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도 해보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나의 17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생산적인 고민이었어요.
최근 들어서 생긴 변화긴 하지만 욕이 줄었어요. 1학년 문제 공감 프로젝트 성담소 팀에서 욕설에 관해 제작한 영상을 보고 나니까 이전처럼 욕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더라고요. 한 번씩 욕을 하면 그 직후에 스스로 놀라고 반성을 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진심으로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됐어요.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전보다 차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직도 말 많고 시끄럽긴 하지만 차분하게 보내는 시간이 늘었어요.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워하지 않고 나름 잘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이전에는 감정에 휘말려서 하는 행동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은 이성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단순히 분노라는 감정으로만 받아들여서 화를 내기보다는 왜 내가 화났는지, 정말 화가 난 것인지를 생각하고 이것을 나의 언어로 전달할 수 있게 됐어요. 감정을 조금 더 섬세한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더 다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행복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나 자신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행복해요.
행복하긴 한데 뭔가 약간 아쉬워요. 사실 학기 중에는 행복한 시간 못지않게 힘든 시간이 많았어요. 이우학교에 온 것 자체를 후회할 정도로 힘든 시간도 길었어요. 사람을 사랑하기까지의 과정에는 사람에게 상처 받은 기억이, 나를 사랑하기까지의 과정에는 그 누구보다 나를 미워하고 못났다 여기던 시간이 있었어요. 그 시간들 속에서 아파하고 힘겨워하던 나를 내가 잊고 행복한 것만 기억하는 것 같아서 그 때의 나에게 미안하고 뭔가 부족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행복하니까 행복하다고 말할게요.
써놓고 보니까 많은 기억이 미화됐네요. 이 글에서 비춰지는 것 이상으로 암울하고 화나고 슬프고 지치고 힘든 일들이 많았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의 시간은 새벽 2시 7분이고 아직 나에게는 영상 편집과 과학 수행평가, 수학 과제가 남았어요. 피곤하고 힘드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결국 좋은 것만 얘기하게 되는 나를 보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을 이해해요. 미화시키고 잊는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너지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어요. 또, 안 좋은 것들을 덮을 수 있는 좋은 일들이 나에게도 존재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힘들었던 만큼, 행복했던 만큼 배운 시간들이었어요.